해발 491m, 부처의 세계에 닿고 싶었을까
설화 속 만일암 터 발굴조사 대흥사 창건, 이곳에서 시작
부처가 기거하는 수미산 저 높은 곳으로 향하고 싶었을까. 해발 491m에 위치한 암자, 천년간 숱한 고승들이 머물렀고 숱한 중생들이 부처님께 드릴 공양을 이고 지고 오르내렸던 암자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두륜산 가련봉(703m) 남서쪽 골짜기에 위치한 대흥사 만일암은 설화 속에서만 존재했던 암자였다.
현재 만일암 터에 대한 정밀발굴조사가 진행 중이다.
만일암은 대흥사 암자 중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암자로 대흥사 본사보다 이른 시기에 지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계종 제22교구인 대흥사의 출발이 만일암 불사에서 시작된 것이다.
전설에 의하면, 426년 신라의 정관존자가 만일암을 창건했는데 그 터가 워낙 강해 세를 누르기 위해 먼저 탑을 세웠다고 한다. 그런데 탑을 완성한 후에 암자를 지으려니 해가 서산 너머로 기울고 있었다. 하루에 절을 완성해야 하는데, 마음이 급해진 정관존자는 해가 지지 않도록 해를 탑에 묶어 놓고 작업을 계속했고 암자가 완공되자 암자 이름을 잡을 만挽자, 해 일日자를 써 만일암(挽日菴)이라 지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실제 만일암은 통일신라 말 또는 고려초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저 높은 산골짜기에 암자를 지었을까.
통일신라 말과 고려 초는 전국이 혼란했다. 지방에서 신흥 호족세력들이 우후죽순 일어났던 것이다. 이러한 신흥세력의 지원을 받아 달마선사의 선법을 이은 구산선문이 전국에 지어졌다. 이 시기, 마산면 은적사 철불과 대흥사 북암 마애여래좌상도 조성됐다.
달마로부터 시작된 선종의 선(禪)사상은 누구나 마음속으로 도를 닦으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혁신적 사상이었다. 중앙권력에 밀려있던 지방의 신진 세력들에게도 이 사상은 혁명적이었다. 누구나 실력을 닦고 쌓으면 왕이 될 수 있다는 호족들의 정치이념과도 맞아 떨어졌던 것이다. 중앙귀족 중심의 교종에 반발한 고승들은 지방의 신진세력들의 지원을 받으며 도시가 아닌 지방의 깊은 산속에 구산선문을 속속 개창했다.
왕족과 중앙귀족들에 의해 지어졌던 불사가 신라 말에서 고려 초엔 지방호족들에 의해 속속 들어서면서 불교는 민중 속으로 더욱 깊게 파고들었다.
만일암 창건 이후 좌우 아래로 북암과 남암도 들어섰다.
현재 만일암 터에는 고려 전기의 오층석탑(문화유산자료 246호)과 석등, 석축이 잔존하고 있고 전라도 정도(定道) 천년수로 지정된 노거수도 가까운 곳에 자리하고 있다.
만일암은 고려시대 이후부터 근대까지 적어도 3차례에 걸쳐 대규모 증‧개축이 이뤄졌고 일제강점기인 1940년 일본인 모로오까 다모쓰가 저술한 ‘조선의 차와 선’이라는 책에 사진이 게재돼 있어 1950년대 이후 폐사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