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와 몸짓의 충돌…작품 완성은 관람자 감성의 몫

린타로 하시구치의 실험 비엔날레의 신선한 바람

2025-09-22     김유성 기자
빗방울을 형상화한 작은 기호들이 화면을 수놓는다. 단순한 도상이 아니라 소리와 리듬을 기록한 듯한 필선이, 문자와 자연 현상 사이의 새로운 관계를 탐색한다.

 

 일본 나가사키 출신 린타로 하시구치는 서예에 펑크 록과 공연의 감각을 더해, 글자와 몸짓, 감정 사이의 벽을 허문다.
그의 작업 도구는 전통 붓이 아니다. 그는 타올을 손에 쥐고 몸 전체를 움직이며, 즉흥 공연처럼 화면을 채운다. 
 화면에 남은 굵은 선과 번진 먹, 찢긴 종이는 단순한 ‘글자’가 아니라 살아 있는 흔적처럼 다가온다. 일상에서 포착한 단어와 생각을 자신만의 조어로 바꾸고, 그 흐름을 거침없이 밀어붙이는 것이 그의 방식이다.
전남국제수묵비엔날레가 열리는 땅끝순례문학관에 린타로 하시구치의 작품이 걸렸다.
그의 작품은 즉흥적으로 보이지만, 선의 굵기와 먹의 농도, 여백까지 세심하게 조율돼 있다. 곳곳에서 글자 조각과 감정의 파편이 부딪히고, 보는 이는 글을 읽으려 애쓰기보다 그 안에 깃든 에너지를 느끼게 된다. 
그는 “감정도, 말도, 형태도 완벽할 필요는 없다. 지금 이 순간 존재한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하시구치는 최근 외딴 섬에서 홀로 생활하며 작품을 만든다. 필요한 생필품은 대부분 ‘아마존’ 배송에 의지하고, 그 박스를 그대로 작업의 재료로 사용하기도 한다. 골판지 위에 드로잉을 남기거나 상자를 캔버스처럼 설치한 작품은 그의 일상과 창작이 자연스럽게 이어져 있음을 보여준다. 
작가는 작품의 해석을 친절히 설명하지 않는다. 그는 “관람객이 느끼는 감정이 곧 작품의 완성”이라며, 해석의 몫을 전적으로 관람객에게 맡긴다.
이번 비엔날레에서 공개된 신작은 일본 종이에 볼펜과 잉크로 남긴 드로잉, 골판지를 활용한 설치, 그리고 퍼포먼스의 흔적이 함께 전달된다. 
록의 거친 리듬, 부토(舞踏) 무용의 느린 몸짓, 구타이 아트의 실험 정신이 한데 얽히며, 서예는 기록을 넘어 ‘존재의 증거’로 태어났다. 또 격렬한 선과 고요한 여백이 맞물리면서 글씨는 정보가 아니라 생존의 몸짓이 됐다.
린타로 하시구치의 작품 앞에 서면, 우리는 “글자를 읽어야 할까, 아니면 그냥 느껴야 할까?”라는 질문을 마주한다. 그의 화면은 언어이자 동시에 언어가 아닌 그림이며, 침묵이자 외침이다. 비엔날레의 전시장은 문자와 몸짓이 만나 새로운 감각을 만들어내는 실험실이 되고, 하시구치는 그 실험의 중심에서 서예의 또 다른 미래를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