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난파선 해남청자’ 천년만에 고향땅

10월14~12월21일까지 군민광장 갤러리 전시

2025-10-20     박영자 기자
군산 십이동파도에서 인양된 고려시대 청자 운반선에서 나온 8,122점의 청자는 해남청자였다. (목포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1983년 물살이 센 완도군 어두리에서 고려시대 난파선이 인양됐다. 놀랍게도 난파선에는 3만여 점의 청자가 원형 그대로 남아있었다. 모두 산이면 진산리에서 생산된 청자였다. 2003년 군산 십이동파도에서도 청자운반선이 발굴됐다. 이중 청자 8,122점이 나왔는데 이도 산이면에서 생산한 해남청자였다. 2019년 목포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에선 ‘고려난파선, 해남청자를 품다’ 특별전이 열렸다. 
1,000년의 역사를 훌쩍 넘긴 시점에서 당당히 해남청자라는 이름을 얻은 특별전이었다. 현재도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해남청자 특별관엔 고려 난파선에서 수습된 해남청자가 전시돼 있다.
오는 10월14일부터 12월21일까지 해남군민광장에 위치한 광장갤러리에서 ‘해남청자, 바다로 가다’ 특별전이 열린다. 화원면 신덕리 초기청자와 산이면 진산리에서 발굴된 철화청자를 비롯해 군산 십이동파도 해저에서 발굴된 청자가 해남군민을 만난다. 다만 귀중한 문화재여서 온전한 형태로 보존된 해남청자는 아니다. 대신 해남문화원이 보관해온 산이면 진산리 출토 철화청자는 만날 수 있다.    
고려시대 초 해남은 최대 청자 생산지였다. 산이면 진산리 일대엔 초기청자 가마터 166기,  화원면 사동 일대엔 100여 기 가마터가 한 공간에 집중돼 있고 규모 또한 국내 최대이다. 이중 화원면 가마터는 중국으로부터 선진기술이 유입돼 우리나라에 청자라는 고급자기를 처음 선보인 곳이고 산이면에선 도자기에 그림을 그려 넣은 철화청자를 최초 생산됐다. 산이면의 철화청자는 이후 전국으로 전파돼 철화청자시대를 열지만 미적수준은 산이면 생산 청자가 단연 으뜸이었다.당시 해남의 초기청자는 워낙 생산규모가 방대해 해남청자만을 전국으로 실어 나르던 청자운반선도 따로 있었다. 해남청자는 고려시대 초인 10세기에서 12세기 초까지 300년 동안 생산됐다.
해남청자는 화원면에서 최초 생산돼 산이면으로 건너가 철화청자와 흑자, 초기 상감기법의 청자 등 다양한 청자기술로 이어졌고 이후 강진으로 넘어가 상감청자시대를 열었다. 현재 우리나라에선 고려시대 침몰한 청자선 10척이 인양됐는데 학자에 따라선 그중 5척이 산이면 생산청자와 관련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만큼 산이면에 대규모적인 도요지가 존재했고 그곳에서 생산된 청자가 전국으로 유통됐다는 의미이다. 현재 해남청자 가마터는 강진군과 부안군 가마터와 함께 고려청자라는 이름으로 세계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재를 진행하고 있다. 
산이면과 화원면에서 대량의 청자가 생산됐던 것은 황토와 찰흙으로 된 지질에서 점토를 구하기 쉬웠고 땔감이 풍부한 데다 바다와 인접해 있어 전국적으로 청자유통이 용이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