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묵의 뿌리 해남에서 마주한 두 거장의 시선

공재 윤두서․겸재 정선 어둠 속에서 마주하다

2025-10-20     김유성 기자
인간 내면을 그린 공재 자화상과 이 땅의 품격을 그린 겸재의 인왕제색도가 어두운 공간에서 서로를 마주하고 있다. 

 

 공재의 자화상과 겸재의 인왕제색도가 걸린 전시 공간은 화려한 장식도, 장황한 설명도 없다. 어둠이 드리운 전시실에 단 두 점의 작품이 서로를 응시하고 있을 뿐이다. 
관람객은 두 작품의 시선 사이에서 인물과 풍경, 인간과 자연을 마주하게 된다. 불필요한 시각적 요소를 걷어내고, 오롯이 작품과 마주하는 순간, 공재의 눈빛은 마치 거울처럼 관람자의 내면으로, 정선의 산수화는 우리가 서 있는 이 땅의 품격을 일깨운다.
윤두서는 인간의 내면을, 정선은 자연의 얼굴을 그렸다. 서로 다른 주제를 다뤘지만 그들이 닿고자 했던 곳은 같았다. 진실한 세계를 기록하고,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성찰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이 두 작품은 단순한 미술품이 아닌 시대와 시대를 이어주는 대화였다. 그래서 오늘 해남에서 두 화가를 만나는 것은 과거의 회상이 아니었다. 오히려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고 있다. 얼마나 진실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가. 얼마나 깊이 세상을 그리고 있는가를.
해남은 오래전부터 ‘수묵의 뿌리’라 불리웠다. 그 중심에는 공재 윤두서(1668~1715)가 있었다. 고산 윤선도의 증손으로 태어난 그는 조선 후기 대범하게 실학 정신을 화폭에 담았다. 
전남국제수묵비엔날레 해남전, 윤두서의 자화상이 정면을 향하고 있다. 당시 사대부들의 초상화가 권위와 이상을 강조했던 것과 달리, 그는 인간 본성을 탐구하듯 그대로의 자신을 담아냈다. 날카로움과 따뜻함, 그의 붓끝에는 인간과 사회를 향한 관찰과 사유가 고스란히 배어 있다. 조선 후기 드물고도 대담한 시도였고, 오늘날 학자들은 조선 사실주의 회화의 선구자로 그를 평가한다.
자화상 맞은편에는 겸재 정선(1676~1759)의 대표작 <인왕제색도>가 걸려 있다. 비가 그친 직후 인왕산에 안개가 드리운 순간을 포착한 작품이다. 
검은 먹과 담묵만으로 바람과 습기, 시간의 흐름까지 그려낸 이 그림은 단순한 풍경화를 넘어선다. 산수는 정선의 손에서 배경이 아닌 주인공이 되었고, 그는 한국 산천을 진경산수라는 새로운 화풍으로 정립했다. 
왕실의 화원 출신이었던 그는 중국 화풍을 답습하던 시대에 직접 산을 오르며 ‘사생(寫生)’을 강조했고, 금강산·인왕산·한강을 실제 모습 그대로 화폭에 옮겼다. 그의 그림에는 자연에 대한 경외와 동시에 인간 삶에 대한 성찰이 담겨 있다.
윤두서의 붓끝은 인간의 본질을 파고들었고, 정선의 붓끝은 땅의 품격을 드러냈다. 두 작품은 침묵 속에서도 강렬한 외침이 돼, 해남은 그래서 여전히 ‘수묵의 뿌리’임을 외친다. 
수묵의 뿌리에서 솟아난 두 시선이 어둠 속에서 만나, 관람객의 감성 속에서 비로소 완성된다. 작품의 마지막 퍼즐은 언제나 관람자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