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게 살아있는 것
2010-11-02 해남우리신문
늘 다니던 길도 한 블록만 달라지면 새 세상인 줄 알고 지레 겁부터 먹는 한심녀이다. 이런 내가 용감하게 길을 나섰다.
주말 가족여행으로 먼저 다녀온 친구의 인간 네비를 생중계로 들어가면서 광주를 벗어나 씽씽 내달리는 고속도로로 들어섰다. 나를 구속하는 이 세상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순간이었다.
88고속도로는 꼭 지방도로 같은 느낌이어서 그렇게 숨 가쁘게 내달리지 않아도 좋다. 친구 말대로 죽치고 직진만하다보면 어느덧 남장수 IC를 지나고, 또 그렇게 직진하다 어느 순간우회전 한 번 하고, 그러다보니 인월센터에 다다랐다.
평일인데도 주차장을 가득 메우고 있는 차량을 보니 여유로운 삶을 지향하는 사람들이 많구나 싶었다.
저들은 문명의 이기심에서 하루쯤은 벗어나 자연동화를 꿈꾸는 사람들일까? 저들의 마음속에 비워낼 것은 뭐가 있기에 고적한 이곳까지 와 생각에 잠겨야할까? 난 또 뭐가 성가셔 도망치다시피 이 먼 길을 혼자 나섰을까? 화려한 나들이가 아니라 내 마음 울적해지면 난 달아나듯이 어디론가 나서고 싶다. 정처 없이 이곳저곳 기웃거리다보면 살며시 고개 드는 귀소본능, ‘나 집에 가야해.’ 집 나설 땐 털어내듯이 떨치고 나온 내 둥지가 해 기울어지면 내가 그들을 지키는 게 아니라 그네들이 나를 지켜주는 등불 같아 보인다.
무작정 가출해, 세상 보니 별거 없다 싶어 쭈뼛거리고 있을 때 그래도 용서하마 손내밀어주는 게 돌아갈 곳이다.
다시 느끼는 안도감 평온함 뭔지 모르지만 다행이라는 자가당착.
둘레길 구간은 들어서보지도 못하고, 센터 앞에서 이생각저생각 머물다가 어딘지도 모를 남원일대를 뒤지고, 코스모스 하늘거리는 지방도로 따라 눈으로 먼저 현혹당하는 사과나무가 이채롭다. 아래쪽에서는 보기 드문 사과과수원을 보니 내가 좀 올라왔나보다.
지리산 둘레길, 다시 생각해보니 날마다 가고 싶은 곳이 아니라,
어쩌다 생각나면 가고 싶은 곳이다. 여행 떠나기 전의 설렘은 단조로운 내 삶에 반기를 든 계기가 아닐까 싶다.
그 머나먼 숲길이 내게 필요한 게 아니라 난 집을 나서고 싶었으리라. 내 일상에서 구태의연한 내 사고방식에서 아주 조금만 자유로워지고 싶었음이리라.
어느 한 구간 초입도 들어서지 못하고 왔는데도 숲길에서 감지해야 했을 그 무엇을 난 도로변 지천에서 흔들리는 억새풀에게서 얻는다. 아, 흔들리는 게 살아있는 거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