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주 시인 16주기 시인을 말한다
2010-02-26 해남우리신문
김남주 시인은 해방이 되던 해인 1945년 10월 16일 전남 해남군 삼산면 봉학리에서 아버지 김봉수씨와 어머니 문일님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광주일고 재학시절에는 입시 위주 교육에 반대해 자퇴를 한 후, 검정고시를 거쳐 1969년 전남대 영문과에 입학한다. 대학 재학시절부터 3선 개헌과 유신헌법에 반대하는 학생 운동을 적극적으로 주도하다 1973년 2월 법대생이던 친구 이강과 함께 반유신 투쟁을 위해‘고발’지를 제작한다. 이 사건으로 징역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 받고, 투옥 8개월 만에 석방되나 학교에서 제적을 당한다.
1974년 해남에 내려와 농사를 지으며 농민문제에 깊은 관심을 쏟으면서 창작과 비평 여름호에 감옥 체험을 통렬하게 그린 진혼가 등 7편의 시를 발표해 문학활동을 시작했다. 1975년 광주 최초의 사회과학 전문서점‘카프카’를 개설해 전남·광주 지역에서 활발한 반독재 민주화 운동을 주도한다.
1977년 재차 귀향해 황석영, 정광훈, 윤기현 등과 ‘해남농민회’를 결성하게 되는데 이후 ‘한국기독교농민회’의 모태가 된다. 그 해 말 광주로 올라가 민중문화연구소를 개설하고 초대 회장을 역임하면서 파리콤뮨 일어강독 중 중앙정보부의 급습으로 피신해 남민전에 가입하게 된다. 1979년 10월 4일 남민전 조직원 80여명의 동지들과 함께 체포 구속돼 혹독한 고문을 받고 투옥돼 15년형을 언도받고 광주교도소에 수감된다.
복역 중이던 1984년 첫 시집 진혼가를 출판하였다. 1985년부터 국내외 문인들의 빗발친 석방탄원으로 1988년 12월 21일 형집행정지로 9년 3개월 만에 전주교도소에서 석방되기에 이른다. 창작 이외에도 프란츠 파농, 파블로 네루다 등의 외국의 진보적인 문학을 번역해 소개하기도 하였다.
수감 후유증과 과로로 인해 건강이 악화되어 1994년 2월 13일 췌장암으로 운명했다. 유족으로 부인 박광숙 여사와 아들 토일 군이 있다. 광주 망월동 5.18 묘역에 안장되었다. 2000년 그의 시에 곡을 붙인 안치환의 헌정앨범‘Remember’가 발매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