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지 고구마
2011-01-18 해남우리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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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물감자’라 불리던 고교 동창생 때문에 해남하면 ‘물감자’를 제일 먼저 떠올렸다.
그런데 막상 해남에 오니 물감자는 도통 찾아볼 수 없고, 밤, 호박, 자색 등 고구마의 진화는 계속되면서, 어느덧 해남의 명물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해남에서 고구마를 볼 때마다 떠올리곤 하는 사건이 있다. 일명 ‘촌지 고구마’다.
때는 바야흐로 1989년 3월. 중학교 때부터 꿈꾸던 국어교사, 게다가 ‘섬마을 총각 선생님’이 되어 신안 도초중에 부임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가정방문을 가게 되었다.
우리반 아이들이 54명이었으니 하루에 18집을 돌아야 하는 강행군이었다.
게다가 이동수단은 ‘최첨단 울트라 캡숑 짱’ 빠른 자전거였다.
섬 길은 뻘땅이라 딱딱한 천연 엠보싱 길을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일은 안장 쿠션이 아무리 좋더라도 고역이다.
그 아픔을 달래며 돌고 돌아 마지막으로 찾아간 집이 우리반 1등(뒤에서) 맹호네 집이었다.
우리 맹호는 일반적인 맹호 이미지와는 사뭇 달랐다.
굼뜨고 어깨 움츠리고 중3이 콧물을 사시사철 달고 살아 누가 보더라도 첫눈에 “젠 1등이겠구나.”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집에 들어선 순간 부엌 풍경이 가관이었다.
부엌 바닥에 깨진 계란 노른자가 흙에 짓이겨져있고, 맹호는 코 찔찔 흘리며 한쪽에서 울고, 어머니는 죄송스런 표정과 함께 얼른 못 그치냐며 애를 닦달하고 있었다.
사연인즉슨 그날 계란이 두 개 남아있었는데 고등학생인 형의 담임이 먼저 가정방문을 하여 어머니께서 최고의 대접을 하고자 계란 ‘후라이’를 하려는데 맹호가 1개를 사수하느라 모자간에 미닥질이 있었단다.
그 와중에 계란이 깨졌고 그 때부터 맹호의 울음은 그칠 줄 몰랐단다.
그걸 듣는 순간 눈물이 핑 돌고 어머니께서 차를 준비하시는 동안 그 녀석과 몇 마디 나누는데 윗목 바구니에 보이는 고구마.
그다지 즐기지 않았지만 그 녀석을 달랠 요량으로 “맹호야 저거 삶은 고구마 아니냐? 선생님 고구마 좋아하는데 하나만 맛보자.” 해서 하나를 대충 맛있게 먹고 어머니와 면담을 마치고 나서는데 어머니께서 부리나케 뒤따라 오시며 노란 푸대봉투를 자전거 뒷좌석에 실어 주는 거였다.
“요것이 뭐다요?”
“고구마여라우, 맹호란 놈이 우리선생님이 고구마를 원체 좋아한다고 기엉코 싸주락 해서 쪼끔 쌌구만이라우.”
그 바구니에 있던 고구마를 몽딴 싼 것으로 당시 농가의 한두 끼니를 해결할 정도의 엄청난 양이었지만 거절 한 번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아니 즐겁고 흐뭇한 마음으로 챙겨올 수 있었다.
그날 밤 우리 하숙집 선생님들은 고구마야식에 곁들여 그녀석의 기특한 마음을 내 침 맞아가며 들어야 했다.
‘촌지 고구마’, 내 초임의 소중한 추억이며, 누구도 편애하지 않고 일등부터 꼴등까지 모두가 소중한 내 강아지로 여기게 해준 사건이었다.
그리고 해남의 무수한 고구마를 볼 때마다 그걸 떠올리면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벙글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