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 “야 임마 복장이 뭐야”

2011-02-22     해남우리신문

이런 교문지도 아직 있는거 아니죠?


박태정 기자


“학교에 다녀오겠습니다.” 꾸벅 인사를 하고 집을 나선다. 월요일 아침 옷을 갈아입고 바쁘게 나오다 보니 명찰을 달지 않았다. 교문 앞엔 매를 든 생활지도 선생님이 선도부와 함께 서있다. 공항 검색대를 통과하듯이 선생님의 눈초리가 학생 하나하나를 훑고 지나간다.
이윽고 선생님의 호통이 들린다.
“너 임마, 왜 명찰이 없어 저쪽으로 가서 무릎 꿇고 있어.” 기분 좋게 집을 나선 하루가 산산이 부서진다. 교문은 학교로 들어가기 위한 관문이어야만 할까. 아침마다 아이들을 주눅 들게 해야만 할까. 물론 우리 지역의 학교가 이렇다는 얘기는 아니다.
경상여중의 이영미 교사는 아이들을 고객의 입장에서 바라보기를 권한다. 은행에서 창구업무를 보는 직원이 고객을 상대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소리를 지르거나 핀잔을 주는 일은 없다는 것이다. 또한 은행문을 통과하는 고객에게 청원경찰이 다가가 복장이 불량하니 나가달라고 주문할 수도 없음과 같은 이치이다.
교문지도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교육자들은 아이들에게 최소한의 사회규범을 가르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아이다운 아이가 어른다운 어른이 된다는 논리도 편다. 그러나 규격화되고 획일성만을 요구하는 사회에서는 개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의 발전은 구성원들의 개성이 조화를 이룰 때 가능하다.
크리스마스 시즌 때 교사들이 산타옷을 입고 학생들을 맞이하며 사랑한다고 포옹하는 교문지도도 탄생했다고 한다. 학교 동아리들이 기타를 치며 맞이하는 교문지도도 가능하다. 너 오늘은 기분이 좋은 것 같다. 더 예뻐졌네. 얼마나 기분좋은 하루가 되겠는가.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하고 차별은 원숭이도 삐치게 한다고 했다. 비판보다는 가능성이 아이들을 밝게 한다.
교육이란 내재한 잠재력을 최대화시켜 주는 것이다. 교육을 교정의 의미로만 본다면 학교는 교도소와 다름이 없다. 교정의 시선으로 아이들을 대한다면 그 눈에는 늘 아이들의 잘못된 점만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선생님 때문에 과목에 대한 선호도가 바뀌기도 한다. 선생님의 칭찬 한마디에 특정 과목을 좋아하게 됐다는 사례는 학창 시절을 돌이켜보면 고개가 끄덕여지는 얘기일 것이다. 다가오는 신학기에는 교문에서부터 기분 좋은 하루를 시작하게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