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 기미 3·1 독립만세운동의 고찰
2011-03-01 해남우리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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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길록(해남항일독립운동 희생자 추모사업 위원장)
92주년 3․1절을 맞게 된다.
해남에서도 항일독립운동이 일어났다. 그때 활약했던 이들을 소개하며 그날의 의미를 새겨보고자 한다.
지강 양한묵선생은 옥천면 영신리 출신으로 이준 열사 등과 헌정연구회를 조직하고 1902년 손병희, 오세창선생 등과 일본 동경에서 만나 통학에 입교한 후 서울에 천도교 중앙종부를 결성해 무사, 좌도부사 등으로 활약한다.
3․1 독립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으로 참여했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돼 1919년 10월 서대문 형무소에서 순국한다.
정암 송봉해선생은 조국광복을 위해 온몸을 바쳐 독립운동을 펼친 이다. 해남읍에서 고려의원을 개업하고 인술을 베풀며 제헌 국회의원을 역임한다.
이승만, 박정희씨 등 친일파들이 득세하는 세상에서는 절대로 독립운동유공자 포상을 받지 않겠다고 거부하다가 1971년 별세했고 이후 28년만인 1999년 김대중대통령 재임 시 비로소 유가족이 훈장과 포상을 수상했다.
1919년 4월 6일 해남장날을 틈타 해남보통학교 학생인 김규수 외 53명이 주동이 된 기미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다.
대한독립만세 운동에서 학생들과 청년들은 광목과 종이, 물감을 구해 소․중․대형 태극기 800여개를 만들어 5월 1일까지 다섯차례나 해남장터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궐기했다.
이 밖에도 삼산, 화산, 송지, 북평, 옥천, 마산, 산이면 등지에서도 산발적인 시위가 계속 됐다. 일본경찰은 주모자 54명을 체포해 조선총독부 목포지원에서 태형 80대~징역 1년까지의 실형을 선고했다.
1919년 4월 24일 문내면 우수영 장날에서도 만세운동이 크게 일어났다. 우수영보통학교 학생 윤인섭 등 10여명의 학생들과 청년 이상순 등 모두 20여명이 나라 잃은 설움을 느끼고 우수영에서 독립운동을 일으킨 것이다.
학생들과 청년들은 태극기와 격문을 만들어 매 장날마다 500여명씩 네 차례나 궐기했다. 이 사건으로 21명이 일본경찰에 체포돼 4개월~1년씩 옥고를 치렀다.
기미 3․1 독립운동 92주년을 앞두고 전국의 어느 고장보다도 활발하게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고향 해남에서 항일독립운동에 가담하였던 희생자들의 애국․애족 정신을 본받아야 할 것 같다.
오는 7월 8일 해남 예술회관에서 해남항일독립운동 희생자들의 숭고한 뜻을 기리는 추모식이 거행될 예정이다. 군민여러분들의 많은 참석을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