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먹거리

2011-03-29     해남우리신문

아동노동반대와 반전활동을 했던 스코트 니어링(1883~1983)은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러한 반전과 평화를 내세웠기에 국익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미움을 받고 간첩 혐의로 재판정에 서야 했고 대학 강단을 떠나야 했습니다. 생애의 절반을 학자와 교수로서 보냈지만 50이 되어서 그는 버몬트 불모지에 들어가 스스로 집을 짓고, 땅을 가꾸며 농부로서  20년을 지내면서 아내 헬렌과 함께 보낸 시골 생활의 모습을 ‘조화로운 삶(Living the Good Life)’이라는 책에 담았습니다. 그의 삶이 알려지자 70이 넘은 그는 더 오지인 메인에 가서 30년을 살다가 만 100세가 지나 그가 사랑하는 땅 속에 묻혔습니다. 메인에서의 삶은 ‘조화로운 삶의 지속(Continuing the Good Life)’에 담겨 있습니다.
소나 양과 같은 동물은 풀이 먹이 유전자 정보에 들어 있습니다. 인간은 동식물을 다 먹을 수 있도록 적응해왔습니다. 추운 극지방의 에스키모인들은 풀도 곡식도 과일도 없기에 구할 수 있는 어류나 육류를 주식으로 삼았습니다. 극지방보다 조금 날씨가 따뜻한 툰드라 초원지대나 사막 주변은 곡식 재배는 어렵고 환경에 적응한 풀들이 있습니다. 이곳 사람들은 소나 양 등을 길러서 그 젖과 고기를 주식으로 삼았습니다. 해안 지역에서는 어패류를 많이 먹었습니다. 더 따뜻한 날씨를 가진 지역은 곡식과 과일을 주식으로 먹었습니다.
서구인들은 초지가 농지에 비해 더 많기에 소와 양 같은 가축을 더 많이 길러서 육식을 더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서구인이 문명인이기 때문에 육식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육식이 문명의 척도라면 에스키모인이나 티베트인이 더 문명인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나라는 나무로 덮인 산지가 많고 농지가 적습니다. 예부터 소가 적었던 것은 넓은 초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적기 때문에 귀하고 비쌌던 것입니다. 소나 양이 많고 곡식이 적은 유목민들에게 곡식이 육류보다 귀한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80년대 이후 공장식 축산이 보편화되면서 소를 풀을 먹여 키우지 않고, 수입 사료를 사서 먹이고 짚이나 건초를 먹이는 축산으로 바뀌었습니다. 신기술이라는 이름으로 그 사료에는 동물성 성분이나 광물성 성분들이 배합되어 공급되었습니다. 심지어는 소의 부산물까지 말입니다. 소에게 소를 먹이는 일들이 영국에서 광우병 파동이 일어날 때까지 지속되었습니다. 광우병 파동 이후에도 소의 사료에 되새김하는 동물을 제외한 동물의 부산물이 들어갑니다. 항생제와 성장촉진제와 함께 말입니다. 지금의 소는 30년 전의 소보다는 체중이 두 배 이상 나갑니다.  
작년 말부터 금년 초의 추위는 극심했습니다. 구제역과 조류독감이 극성을 부린 시기와 거의 일치합니다. 추위와 밀식과 운동 부족과 햇빛을 보지 못해 면역력이 떨어진 가축에게 구제역과 조류 독감이 더 기승을 부렸을까요?
광우병 사태 이후 영국은 채식인의 수가 증가하여 3퍼센트를 넘고 미국도 1퍼센트를 넘고 있습니다. 스코트 니어링과 슈바이쩌는 광우병 이전의 사람이지만 채식으로 살았고 절제된 생활을 했습니다. 육식은 문명인의 척도가 아닌 식습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