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운동협의회 사건 80주년을 맞아

2011-04-12     해남우리신문

오길록(해남항일독립운동 희생자 추모사업 위원장)


80년 전인 1931년 4월 초 일제시대 최대 규모였던 비밀결사단체인 전남운동협의회가 해남 북평에서 결성된다. 해남과 완도 출신 애국청년들이 주도가 돼 결성된 이 조직은 1934년까지 비밀리에 활동을 전개한다.
서울경신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와세다대학교 전문부 재학 중 반일삐라 살포로 퇴학을 당해 강제 귀국한 김홍배 학생 등이 주도가 된 이 조직은 광주를 비롯한 전남의 9개 군 청년들이 북평면 동해리 성도암에서 첫모임을 갖고 활동을 시작한다. 주요활동 내용은 소작쟁의 운동과 야학, 야경, 무산자 해방운동이었고 이를 위해 농어민과 노동자, 지역사회 유지들까지 조직에 총 망라시킨다.
이들 지도부는 대흥사 심적암과 미황사 부근의 묘지, 북평면 와룡리, 산이면 상공리 뒷산 등지에서 비밀 모임을 갖고 「농민투쟁」 기관지를 발행 및 배포했다. 그 당시에는 마을회관이나 교회 등이 없었기 때문에 절이나 산, 계곡 등을 주로 이용했다.
각 군과 면․마을까지 청년반, 소년반, 농민반, 야학반을 결성하고 인금 인상운동, 조합공제 적금 환불과 소작료 감면요구 등 3년 동안 소작쟁의운동과 빈농대중운동을 전개하다 1934년 4월경 일본경찰에 적발돼 558명이 체포됐다. 이중 57명은 구속돼 온갖 고문을 받으며 투옥 생활을 했다.
해남출신은 김홍배와 김영식, 김신재, 문홍재(북평 이진), 오문현(오산), 박태술, 김용섭, 박종기(서홍), 천덕운(현산 일평), 오임탁, 오홍탁, 오양탁(산이 상공) 등으로 조선총독부 목포지원에서 1~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전남운동협의회 사건과 관련된 해남출신 애국지사 12명중 현재 5명만이 독립유공자로 추서되고 7명은 추서되지 못하고 있다.
추서되지 못한 분은 자손이 절손되었거나 일부 인사는 1946년 11월 1일 해남추수봉기 때 주모자로 체포된 후 1948년 보도연맹에 강제로 가입됐기 때문이다. 이들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 경찰에 의해 강제로 진도 갈매기섬에 끌려가 학살을 당한다. 그리고 이후 공산주의자로 매도당하고 후손들은 40여년 동안 연좌제에 묶여 교육도 못 받고 취직을 하지 못하는 불이익을 받았다. 백 명의 도둑을 놓치더라도 한 명의 억울한 사람을 도둑으로 몰아서는 안 된다. 하물며 독립운동을 했던 애국지사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갈매기섬과 계곡 등지에서 학살시킨 왜곡된 과거사를 하루빨리 청산해야 한다. 이 같은 슬픈 역사가 또다시 되풀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끝으로 우리 후손들은 해남에서 희생된 항일독립운동 순국열사와 애국지사 157분을 기리는 추모탑을 건립해 그분들의 희생정신을 추모하고 애국․애족정신을 귀감으로 본받으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