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의 벗, 나의 친구 정광훈
2011-05-24 해남우리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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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록은 이렇게 푸르기만 한데, 친구는 지금 어디를 가고 계신가. 친구가 지키려 했던 이 땅의 밀과 보리는 저렇게 푸르기만 한데, 친구가 일으키고자 했던 이 땅의 민중들은 이렇게 애타게 자네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친구는 이 모든 걸 다 뿌리치고 어디를 가고 계신가.
존경하는 나의 벗, 정광훈!
자네와 함께 했던 어린 시절을 돌아보네. 일제 말엽과 6․25는 모두에게 견디기 힘든 시기였지. 자네는 유난히도 손재주가 좋은 아이였어. 목포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해남읍에서 전파사를 운영던 시절에는 드라이버 하나면 못 고칠 것이 없었지. 아마 그길로 쭉 나갔으면 그 기술만으로도 자네는 편히 살 수 있었을 거야. 어쨌든 그때까지만 해도 자네는 평범한 한 집안의 가장이요, 한 여인에게는 믿음직한 남편이었지. 그러나 농민의 아들이었던 친구에게 산업화에 내몰려 버려진 70년대의 농촌현실은 단란한 가정을 꾸려갈 꿈마저 앗아가 버렸지. 해남YMCA 농어촌 위원장을 시작으로 수세 싸움 등 수많은 집회 현장에서 자네는 하루도 등 편히 쉴 날이 없었어. 수배와 투옥으로 점철된 생애, 자네는 그렇게 들판이 아닌 광활한 아스팔트에서 농사를 지어가기 시작했지.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자네의 성격 때문이었지.
존경하는 나의 벗, 정광훈!
지금이라도 어디선가 가방 하나 둘러메고 흔연스레 웃는 얼굴로 나타날 것만 같구려. 더러는 지역의 후배들과 자주 다니던 맥주집 어귀에서, 더러는 담배 연기 내뿜으며 농민회 사무실 계단을 올라설 것만 같네.
자네는 민중을 탄압하는 세력들을 향해서는 사자후의 독설도 마다하지 않았지만, 동지와 후배들에게는 항상 웃어주는 온화한 사람이었지. 사람을 너무도 좋아했던 순수하고 소탈했던 사람, 젊은 사람들과도 망년지교로 지내던 한없이 자상하고 인자한 어버이. 그래서 사람들은 자네에게 형님이나 삼촌, 아저씨라는 호칭 대신 나이 고하를 떠나 두루 통용되는 ‘정 의장님’이라고 불렀던 것이지. 자네는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는 훌륭하지 못했을지라도 영원한 민중의 벗이요 그들의 아픔을 어루만져 주는 최고의 아버지였지.
반평생을 싸움의 현장에서 보내야 했던 나의 친구, 일선에서 물러나 마산면에 자그마한 쉼터를 마련하고 이제야 등 편히 기대고 쉬는가보다 했는데, 운명은 그마저도 잔인하게 들어주질 않았나보네.
자네는 영원한 청년이었기에 이 못난 벗은 땅에 넘어졌다 일어나듯 훌훌 털고 다시 일어날 것이라고 믿고 있었네. 친구가 훌쩍 떠나버린 이 현실이 너무도 안타깝네.
오랜 세월 벗을 잃은, 민중의 지도자를 잃은 상실감에 빠져 자네를 무척 그리워할 것 같네.
믿기지 않지만 우리는 이렇게 자네를 떠나보내야만 하는가 보네. 이제 우린 자네를 영원한 민중의 품에 묻네. 자네는 다시 수천수만의 민중으로 부활하겠지.
친구가 가고 있는 곳은 친구의 일이 없는 세상이겠지. 자네가 그토록 바랐던 민족통일, 민중해방은 아직 멀었지만 그 세상은 이제 남은자의 몫이네. 그날이 오는 날 수많은 자네의 되살아난 분신들이 자네의 무덤을 찾을 것이네. 이제 그곳에서는 그냥 편히 쉬시게.
친구의 영전에 죽마고우 윤상철이 올리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