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한국전쟁 61주년 특별기고
2011-06-21 해남우리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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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과 해남의 억울한 희생자들
오길록(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 해남군 유족회 창립회장)
6월 25일은 한국전쟁 발발 61주년이 되는 날이다.
36년 동안 일제강점 치하에서 시달리다 1945년 8월 15일 조국이 해방되었으나 한반도가 미․소 강대국들에 의해 3․8선으로 분단되는 비극이 초래 되었다.
해방 직후인 1946년 11월 11일 화원면을 제외한 해남 13개면에서 1000여명씩 1만3000여명이 동시에 궐기해 해방된 조국에서의 미곡 공출반대, 소작농에 대한 토지분배, 친일 경찰 척결 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각 면사무소와 지서를 포위하고 시위를 벌였다.
미 군정당국과 친일경찰들은 주모자 600여명을 체포해 그 중 200여명을 구속시키거나 총살해버리고 나머지 가담자 400여명을 1948년 이승만 정권의 체제유지를 위한 보도연맹이라는 관제조직에 가입시켜 감시와 순화교육을 시키던 중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이승만 정권과 계엄사령부는 인민군이 점령하게 되면 보도연맹원들이 인민군에게 협조할 것이라는 예단 하에 예비검속(불법체포)후 사살한 뒤 부산으로 후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7월 12일부터 해남의 보도연맹원 352명을 각 지서와 경찰서, 양곡창고 등으로 강제연행한 후 7월 14일 밤 해창항과 어란항에서 어선을 강제 동원해 갈매기 섬으로 끌고 가 학살을 자행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와 같은 사실은 당시 갈매기섬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나온 故박상배씨(산이면 금호출신)가 1963년 필자에게 직접 전언해준 사실이다.
또 나주부대는 해남읍과 마산 장성리, 화산, 현산, 송지면을 지나면서 포수가 짐승 사냥하듯 무고한 민간인들을 학살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나주부대에 의한 피학살자는 200여명이 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9.28 수복 후에는 두 달 동안 인민군에 협조한 부역혐의로 마산면 붉은데기, 두드럭재, 산이면의 뻔지, 계곡면의 월암고개와 화산 해창 나붓재, 현산 장고개, 송지 산지목, 북일 오심이재등지에서도 수십 명씩 무차별 희생되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70세 이상이면 누구나 다 기억하고 있으며 2007년~2009까지 정부산하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의 진실규명 확인결과 발표를 통해 유가족과 국민에게 사과했다.
국민의 재산과 생명을 지켜야할 국가기관과 청산되지 않은 친일경찰과 군인들이 저지른 만행이다.
해남에서 400여명의 민간인 학살신청이 접수되었고 379명에 달하는 억울한 양민학살의 진실이 규명된 결정을 받게 되었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희생자들의 피해보상법을 제정하여 국가배상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끝으로 해남군은 진실화해위의 권고사항인 희생자 위령사업에 역점을 두고 합동위령탑을 건립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