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선(전 송치초 교장) -교단을 떠나며-

2011-09-03     해남우리신문

H형!
계속된 장마 틈새로 초가을 햇살이 기웃거리나 싶더니, 고추잠자리가 하늘을 맴돌기 시작합니다.
가까운 이웃에 살면서도 처음 해남에 첫 발을 내딛으며 낯설기만 하던, 가을로 접어든 여름 끝자락 햇살에 그을린 구릿빛 얼굴에 시골 인심의 넉넉함과 따뜻한 정겨움으로 맞아주시던 꼭 이맘 때의 12년 전의 형의 그 모습이, 고추잠자리 날개짓 끝에 파문되어 선명하게 되살아납니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자란 저로서는 맑고 고운 마음으로 욕심 부리지 않고 부지런히 살아가는 형 내외의 모습들이 마치 어머니 어버지의 모습처럼 한 없이 정겨웠습니다.
그러한 정겨움 속에서 나의 땅끝의 삶들이 싹을 틔우기 시작한 가을이 깊어가던 날, 무서리가 무던히도 내려 마른 풀섶이 하얗게 덮인 아침 등굣길에서 시린 손 마다하지 않고 쓰레기를 줍던 아이들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런 아이들을 키워가는 해남 어른들의 정겨움 속에서 나를 성찰하고 다듬어 보았습니다. 해맑고 순박한 우리 아이들의 심장에 큰 꿈들을 심어 반드시 그 꿈을 이루어가도록 해야겠다며 나름대로 당찬 결심도 했습니다.
인심좋고 살기좋은 땅끝에 깊게 뿌리박고 살다보니 12년이라는 짧지 않은 세월을 한 날같이 행복하게 살다 이렇게 정년을 하게 된 것 같습니다.
아마도 금강골의 청류 1급수가 흘러 목마른 들녘을 적시고, 흐르다 머물러 강을 만들고 다시 청정 바다를 이루어가듯이 해남인의 ‘淸心少慾 勤勉誠實’로 情을 다져 넉넉한 인심들이 면면히 세월을 흘러, 1급수가 된 정겨움의 바다에 내가 흠뻑 젖어 은혜로움 속에 살았나봅니다. 그새 12년이라는 세월이 훌쩍 지나간 것 같습니다.
H형!
정겨움 속의 행복한 해남 12년의 세월 동안 가장 가슴 뿌듯한 일은 우리 아이들이 스스로 자신을 가꿀 수 있도록 가슴에 큰 꿈을 심어 준 일입니다.
또 아이들이 장차 세계의 주역이 될 수 있도록 해남인의 긍지와 역량을 쌓아 준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넉넉하고 따뜻한 인심과 정겨움, 그리고 아름다운 자연 풍광들이 글의 자양분이 되어 시인의 꿈을 실현한 것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이렇듯 땅끝에서 사는 12년 동안 더욱이 땅끝 속의 땅끝 송지에서의 끝자락 3년6개월 동안 학부형님들과 함께 송지교육의 기반을 튼튼히 다져간 일은 정말 가슴 벅찬 행복한 시간들이었습니다.
“인생은 모든 것이 곤란이다. 하지만 단언컨대 성실한 마음으로 물리칠 수 없는 곤란은 세상에 없다”라고 한 소크라테스 말을 증명한 행복한 시간들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H형!
한 겨울에도 해남에서는 초록빛 배추가 풋풋하게 자라듯 어린이들도 어른들의 ‘청심소욕 근면성실’로 다져진 ‘정’ 속에서 항상 아름답게 자라 살기 좋은 해남, 정겨움이 넘쳐나는 땅끝 해남은 무궁하리라, 아니 나의 제2고향 땅끝! 이 아름다운 정겨운 모습들은 영원하리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