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엽제로 고통받은 전우들 끝 읍 신안리 나도기씨
2010-03-07 해남우리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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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을 못자니까. 금방 방문을 열고 누군가 총을 쏴댈 것만 같고, 죽은 사람의 찢어진 몸뚱이가 눈에 어른거리는데, 방에서는 잘 수가 있어야지.”
“그럼 굴이 참호 개념인가요?”
“그렇제, 방공호제. 여그서 3년을 살았는디. 여그 들어오먼 맘이 차분해져서 잠도 잘 와. 이걸 파느라고 열흘이 걸렸제. 그때는 나를 사람들이 신안리 타잔이라고 했제. 팬티바람에 맨발로 살았응께.
발바닥 보자는 사람도 많았제.”
해남읍 신안리에 살고 있는 나도기(61)씨는 71년 맹호부대 소속의 베트남 파병 용사이다. 고엽제 후유의증으로 경도 판정을 받은 그는 베트남에 참전했던 14개월여 중 8개월을 첨병활동을 하면서 가장 치열한 전투를 치르고 살아남은 사람이다.
그는 백마부대에서 1개월의 첨병교육을 받고 8개월을 첨병, 6개월은 전투부대에서 활동을 했다. 첨병이란 소대의 안전을 확보하고 적의 징후를 포착하기 위해 소대의 30m 전방에서 수색 임무를 맡는 일이라 가장 위험한 임무였다. 통상 첨병의 15m 후방에 부첨병이 위치하고 그 뒤 15m 후방에 소대가 위치하게 된다.
그는 전투에서 여러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는데, 한 번은 나무 위에 놓인 예쁜 보자기를 건드렸는데 그게 그만 폭발을 해버린 거였다. 월남군이 설치한 부비트랩이었던 것이었다. 그 사건으로 등에 온통 파편이 박혔지만, 부대 안에 그보다 첨병 임무를 더 잘 하는 사람은 없었기에, 부상당한 몸으로도 압박붕대를 감고 전우들의 안전을 위해 첨병을 자원했다.
나씨가 앓고 있는 고엽제후유의증은 미군이 헬기로 살포한 고엽제 때문이다. 부대의 시야확보를 위해 부대주변 4km의 풀과 나무를 고사시키는 불모지 작업을 해야 하는데, 한국군은 정글칼이나 불을 지르는 방법을 동원했지만, 미군은 헬기를 동원해서 고엽제를 살포했다. 나씨는 첨병 임무를 띠고 정글을 누비는 과정에서 고엽제에 접촉이 되었다. 나씨는 90년 갑자기 걷지도 못하고 살이 빠지기 시작했다. 목포의 성콜롬반병원에 갔지만 뚜렷한 병명은 나오지 않고 고엽제후유의증이란 진단만 받았다.
나씨는 5형제 중 3명이 월남에 다녀왔다. 큰형님은 나씨가 토굴에 살던 75년 경에 38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는데, 고엽제로 추정된다고 한다. 올해 32살인 나씨의 아들 또한 고엽제의 희생양이다.
정글에서 살아나온 나씨는 산에 오르면 마음이 편해진다. 나씨는 농장에 오면 스피커를 통해 그날의 군가를 듣는다. 군가를 들으면 희망이 생기고 용기가 샘솟기 때문이다. 국가와 사회의 외면 속에서도 그는 그날의 군인정신으로 농장을 일구고 살아가고 있다.
한마디로 산전수전을 다 겪은 나씨는 죽는 것은 두렵지가 않다. 다만 살아야 할 현재의 가난과 자신이 잊혀져가는 것이 두려울 뿐이다.
신안리에 살고 있는 나씨를 찾아 나선 것은 추적추적 봄을 재촉하는 비가 내리는 2월의 마지막 날이었다. 나씨가 파놓은 땅굴을 보기 위해서였다.
호리호리한 키에 짧은 머리, 그리고 시커먼 얼굴에 눈매가 날카로운 나씨는 극한의 전쟁공포증으로 인해 한때 땅굴 속에 살아야했다.
지름 1m 정도의 굴 입구. 밖에서 보는 것과는 달리 호리병처럼 안쪽은 꽤 넓은 굴이었다. 그 굴은 고엽제를 앓고 있는 그의 생애를 대변해 주는 것 같아 가슴이 아팠다. 박태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