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워 너무도 그리워서

2011-10-07     해남우리신문

남편 성씨는 윤씨, 흑일도 제부 성씨는 주씨, 시어머님 성씨는 보성 선씨, 며느리 성씨는 전씨, 큰 사위 성씨는….
친정 어머니 돌아가시던 그해 78세에 접어드시면서 당신이 느끼시기에 자꾸 뭘 잊는다는 걸 짐작하셨음인지 차례로 같은 소리를 몇 번이고 종이에 적어놓으셨던 것 같다. 그리고 기억이 안 나시면 한참 바쁘게 일하는 내게 전화해서 “아야, 니째야 느그 김서방 성씨가 뭣이다냐?” “엄마는 김서방 성씨가 김씨지 뭔 씨여?” 짜증 섞인 내 목소리는 급기야 “바뻐!”하고 매몰차게 수화기를 내동댕이치듯 끊어버리곤 했다.
누구 말상대가 없는 하루를 그렇게 보내시곤 하셨던 어머니는 메모하셨던 그 종이를 얼마나 많이 접고 펼쳐보았는지 공책장이 다 헤져서 흐릿한 것은 무슨 의미인지 모를 단어도 꽤 많았다.
그 헤진 공책과 돋보기 안경, 그리고 한조각의 머리끈이 어머니의 작은 손가방 속에 들어있었다. 심하게 두통이 올라치면 머리가 앞으로 쏟아지신다며 당신의 공단 치마끈을 뜯어서 머리 사이즈에 맞게 손바느질 하시고 머리에 질끈 동여매셨던 그 끈을 아주 소중히 비닐봉지에 담아서 신문지에 한 번 싸고 또 비닐봉지에 넣어놓았다. 그것도 내게 소용이 있을 거라 생각하셨을까? 작은 손가방 속에는 또 한 쪼가리의 쪽지가 있었다.
송지 산정에서 일제 때 초등학교를 나오신 어머님의 필체는 그 일본 선생이 노상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노라며 항상 자랑하셨듯이 아주 달필이셨다. “넷째야, 나중에 네 눈이 나뻐지거든 이 돋보기를 쓰거라. 나중에 이것도 살려면 다 돈이란다. 해남 서독안경집서 제일 비싼 걸로 맞췄다.”
서독, 내 어릴 적 간호사 신분으로 서독에 취업을 나가신 이모가 계셨는데 어머니는 그 나라가 세계에서 제일 잘 사는 나라로 아시고 그 나라에 사는 이모를 제일 자랑으로 여기셨다. 난 지금도 그 서독이란 글자에 힘을 줘서 말씀하시던 어머니의 음성을 잊지 못하고 있다.
어째서 당신은 내가 항상 힘들게 못 살아서 나이 들면 돋보기조차도 마련하지 못한다는 생각을 하신건지. 어째서 당신의 시력하고 내 시력이 같을 거라고 생각을 하셨는지. 어째서 당신이 가지고 계신 것 중에서 고작 돋보기가 재산목록 1호라고 생각하셨는지. 머리끈은 왜 그리도 소중하게 싸두셨던지.
돋보기 케이스도 그럴싸하고 테두리도 아주 고급스러워보이는 걸로 보아 정말 당신의 말마따나 제일 좋은 걸로 하셨는지는 몰라도 글씨는 도저히 읽을 수가 없게 내 시력을 거부해서 혼자 한참을 웃었다.
아마도 어머니께서 먼 훗날 당신이 돌아가실 때 무엇이라고 내게 주고 싶었는데 당신이 가지고 계신 게 아무 것도 없어서 돋보기라도 좋은 걸로 해주고 싶었음을 생각하니 왜 주책없이 작은 내 눈에서는 유통기한도 없는 눈물이 시도 때도 없이 그렇게도 울컥울컥 제조를 잘 하는지.
남동생의 해외 이주로 인해서 내 차지가 된, 며칠 후로 돌아오는 아버지의 기일에 아마도 난 함께 오실 어머니를 부쩍 많이 기다리고 있었나보다. 오늘처럼 남편과 아이가 늦게 온다며 혼자 저녁 먹으라는 전화를 받은 날은 노상 혼자서 밥을 먹으려니 입안이 깔깔하다시던 내 어머니의 혼잣말이, 그때는 정말 듣기 싫었던 그 타령이 오늘은 그리워 너무도 그리워서 울컥 목울대로 치밀고 올라온다.
문득 다시 꺼내어 만져보는 내 어머니가 쓰시던 돋보기 속으로 그리운 어머니의 가녀린 미소가 묻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