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문학축전 청소년백일장 대상작 - 이서연(안양예고 2년)
2011-10-24 해남우리신문
분주한 발걸음들이 현관을 빠져 나가자
집안엔 엄마의 오전만이 덩그러니 남는다.
(아무도 엄마에게 신경 쓰지 않는 시간)
설익은 가을볕과 텅빈 거실에
울리는 분침소리
다음 계절을 향해 가는 구름을 따라
엄마의 사색은 멀리도 간다.
베란다 의자에 정물로 앉아
보살피지 않아도 잘 자라는 수선화처럼
혼자 조용히 늙어가는 엄마
펼쳐진 가계부를 뒤적이다
유리잔에 녹차 티백 하나 담근다.
엄마의 눈빛이
티백을 넣었다 뺐다를 반복하자
물의 틈으로 천천히 흩어지는 녹차
나는 집안 가득히 퍼지는 향기를 맡으며
방 곳곳에 진하게 우러나는
엄마의 세월을 몰래 읽어본다.
헤진 거실 가죽 소파에 쪼그려 앉아
일일 드라마 보며 눈물을 흘리시던 모습
혼자 침대 위에서 뒤척이던
갱년기의 밤을 지나
엄마의 가슴 앞에서 사라지는 이야기
책장 사이에 끼워져 있던
바삭 마른 단풍잎은
내가 모르는 엄마의 청춘일까.
연한 녹차 잎처럼 물기 많은
여고 시절을 떠올리는 건지
엄마의 코끝이 붉다.
나는 그 시간에 책갈피 하나 꽂아 놓는다.
빈집처럼
아무도 찾아와 위로해 주지 않는 계절의 틈
가득 채워진 집에서는 보지 못했던 풍경들
여름의 끝을 알리는 매미의 마지막 울음이
창문을 넘어 은행나무 사이로
노랗게 들려온다.
녹차를 한 모금 마시는 엄마
나는 엄마의 책을 천천히 덮는다.
집에 새겨진 세월의 틈으로
진한 녹차향기
아득히 스며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