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피해 해남에 정착한 성씨들
2010-03-26 해남우리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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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시 대거 낙남 경주정씨·전주최씨·김해김씨·청주한씨 등
참, 사람들은 자신의 성씨를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자신의 뿌리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겠지요.
임진왜란 이전에만 해도 성은 소수 양반들만 가질 수 있었지요. 그런데 임란 이후 사회가 혼란해지면서 너도나도 성씨를 갖게 됩니다. 설사 돈을 주고 성씨를 샀더라도 모두가 성을 갖게 됐다는 것은 평등의 측면에서 다행이라고 봐야 되겠지요.
현재 해남에는 여러 성씨들이 살고 있습니다. 특이하게도 해남에 정착한 시기가 빠른 집안일수로 국가에 난이 발생했을 때 선조 중 한 명이 은둔지로 해남을 선택하면서 해남과의 인연이 시작됐다는 것입니다.
아마 이러한 연유 때문에 해남을 은둔지라 부르는지 모르겠습니다.
조선 초 세조는 조카인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오릅니다. 이를 계유정란이라 부릅니다. 해남에 정착한 시기가 빠른 집안 대부분이 계유정란과 관계가 있습니다. 마산 산막리로 낙남해온 원주이씨도 그 중 하나입니다. 계유정란이 일어나자 이영화는 마산 산막리로 내려와 산에 움막을 짓고 생활합니다. 그래서 마을 이름이 산막리가 됐다는 것이지요. 이영화로부터 시작된 원주이씨는 마산을 비롯해 해남 곳곳으로 퍼져 나가지요. 같은 난으로 무안박씨 박종정은 마산 연구리에 정착합니다. 여흥민씨 민중건은 읍 해리로, 순천김씨 김효우는 계곡 방춘으로, 통천최씨 최윤옥은 옥천 흑천리, 의성김씨 김호는 황산 일신리로 낙남을 합니다.
물론 해남성씨 중 더 빠른 연대를 기록한 집안도 있습니다. 해남윤씨가 그 중 하나입니다. 고려 공민왕 때 사온직장을 지낸 윤광전이 이성계의 조선건국에 회의를 느껴 해남에 내려온 것이 해남윤씨의 시초가 됩니다.
어찌되었건 계유정란으로 시작된 각 성씨들과 해남과의 인연은 이후 연산군 때 일어난 무오사화로 다시 이어집니다. 성종실록에 실린 사초 조의제문으로 김일손 등 사림파들이 대거 숙청되는 난을 무오사화라 일컫습니다. 당시 기득권 세력이었던 훈구파에 의해 신진세력으로 성장하던 사림파들이 대거 숙청된 무오사화로 김해김씨 삼현파 김하는 산이면 노송리로 낙남해 옵니다. 청주한씨 한세전은 삼산면 상가리로 내려오고 전주이씨는 영암으로 낙남한 임명대군 손이 황산 부곡으로 내려와 정착합니다. 진주강씨와 경주정씨는 제주도 유배길에서 조카인 강징과 정승조를 각각 송지 해원과 미야리에 남겨 놓으면서 해남과 인연을 맺게 된 예입니다. 창령조씨는 선조 중 영암으로 유배 온 사람이 있었는데 그 후손인 조세직이 송지 사구미에 정착하게 된 경우입니다. 무오사화 때 은둔이 아닌 해남으로 유배와 그 손이 정착한 예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대제학을 지낸 문의박씨 박문덕이 동생 박귀덕과 함께 옥천 용동으로 유배 온 경우입니다. 평강채씨 채천송도 같은 사화로 화산 마루도로 유배옵니다.
계유정란과 무오사화 때 대거 해남과 인연을 맺게 된 성씨들의 낙남은 기묘사화와 을사사화 때도 이어집니다. 기묘사화로 남평문씨 문억봉이 황산 관춘으로 내려오고 제주양씨 양예용은 옥천 죽촌에 정착합니다. 을사사화 때는 파평윤씨가 옥천으로 낙남합니다. 영조 때 안동김씨에게 밀려 진도로 유배 가던 작은 아버지를 따라가다 황산 우항리에 정착한 전주이씨 이명석도 있습니다. 각종 난을 피해 해남에 정착한 성씨들은 대부분 해남의 토반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해남 대표 성씨로도 알려진 이들 성씨들은 이후 이름이 알려진 후손들을 많이 배출합니다. 무안박씨의 경우 해남육현 중 한명인 취죽헌 박백응을 배출하고 해남윤씨는 윤선도 등 굵직한 인물들을, 김해김씨 삼현파는 임란 충신인 김안방 등을 배출하지요. 특히 이들 집안에서는 학자와 충신들을 많이 배출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이들 성씨 후손들은 자신의 뿌리에 대한 자긍심이 대단하지요.
물론 이들 성씨들이 해남에 낙남하기 이전에도 해남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겠지요. 해남에 남아있는 유적을 통해 구석기 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이 있으니까요. 그러나 각 집안의 내력은 족보를 통해 알 수밖에 없는데 대부분의 족보에는 해남과의 인연을 조선시대부터 기록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