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의 차 문화를 읽고-윤옥하(서울 향우)
2012-05-06 해남우리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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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의문화제 독후감 공모전 장려상
나의 서울살이도 이제 40년이 지났다.
낯선 사람을 많이 만나게 되고 그럴 때면 고향이 어디냐고 묻는 것이 수인사가 되었다. 그때마다 나는 긍지와 자부심을 갖고 고향 해남을 알기 쉽게 두 가지로 나누어 대답했다.
하나는 위도 상 한반도의 땅 끝이 해남에 위치 한다는 것과 또 하나는 조선시대 제일의 시조 시인 고산 윤선도와 송곳처럼 쏘아보는 눈빛과 나부끼는 수염의 초상화로 유명한 그의 증손자 공재 윤두서가 해남의 자존심이라고 자랑했다. 그러나 이번에 <해남의 차 문화>를 읽고 고산과 공재 선조를 해남의 자존심이라고까지 표현한 것은 후손된 자의 조금 지나친 편견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을 갖게 되었다.
해남 차 문화의 성지 대흥사를 나는 초등학교 때 소풍가서 처음 보았다. 50년도 더 지난 그때 보았던 단풍나무의 붉은 숲과 질서 정연했던 천불전 불상의 모습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리고 일지암은 북미륵암과 함께 중학생 때 보았다. 당시의 두 암자는 잡목 사이에서 오랜 세월을 견디지 못하고 쓰러져 가는 보잘것없는 낡은 암자에 불과했다.<중략>
그리고 20여 년 전 유흥준 교수의 <나의문화유산답사기>제1권에서 초의선사, 그리고 <동다송>, 일지암이 지니고 있는 역사와 문화적 가치에 대한 짧은 글을 보았을 뿐이다.
그 정도의 식견에 머물렀던 내가 <해남의 차 분화>에서 초의선사가 누구며 <동사송>이 어떤 책인가를 비로소 제대로 알았다.
또 50여 년 전 초라했던 그 작은 암자가 우리나라 차 문화의 성지이자 <동다송>의 산실 일 줄이야.
<해남의 차 문화>는 차의 백과사전 <동다송>과 저자 초의선사에 대한 해설서다. (중략)
세계의 유명한 문학 작품의 탄생에는 늘 극적인 계기가 있듯이 <동사송>역시 예외가 아니라는 사실이 흥미롭다.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시대에 변방의 초의선사가 영조대왕의 부마요 이조판서에 대제학까지 지낸 해거도인 홍석주의 부탁을 거절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는 <동다송> 맨 첫줄에 ‘해거도인의 명을 받들어 불문에 있는 초의 의순이 짓는다’에서 알 수 있다.
또 훗날 남종 문인화의 비조가 되는 소치 허유를 추사에게 멘토가 되도록 주선한 초의 선사의 혜안이 없었다면 세계적인 소치일가 화백 5대가 존재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산 정양용의 아들 학연과 학유와의 교제는 아름다운 시가가 되었고, 수많은 고승, 석학, 거유들과의 어울림에서는 조선후기 인맥을 엿 볼 수 있어<해남의 차 문화> 독자만이 누리는 기쁨이 된다. 이와 같이 <해남의 차 문화>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해남의 역사와 문화적 가치에 대해서 해남사람은 긍지와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