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과 동학농민운동

2012-07-27     해남우리신문

임상영(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우리나라 근대 역사에서 가장 큰 농민운동이자 구국운동이었던 동학은 해남에선 어떻게 전개됐을까.
필자가 조사한 각종 문헌 기록을 보면 1892년 천도교가 해남읍 성동리에 교당을 설립된 후 포교를 시작한다. 홍순씨가 초대 교구장에 취임했고 해남 교도들도 ‘무인년 신문고사건’ ‘협동조합운동’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해남에서 처음 동학에 입도한 사람은 김도일, 김춘두, 나치운이며 1892년~1893년에 걸쳐 김병태, 김의태, 홍 순(해남 초대 교구장), 김순근, 김원태 교도가 입교한다. 순무선본견 등록에는 김신영, 백장안, 전유희, 윤주현, 김형, 등과 일본죄인록 기족에 접주 윤주현, 교수 김 동, 박인생, 접주 김순오, 교장 박익현, 집강 이은하, 별장 박사인, 교수 김하진, 파일면(화산면 상부지역) 김민국, 박인철, 현산면 접사 장국서, 교수 이중호, 도집 임재환, 집강 최원규, 녹산면(삼산면 상부) 접주 김경재, 접사 박홍녕, 해남접사 강준호이며, 계곡면 접주 주정호, 황산 남리역 대접주 김신영씨 등이 기록으로 나타나고 있다.  해은 민건호(마산면 장촌리)씨의 일록에는 1894년 장흥 석대들에서 전라도 동학농민군이  관군의 신식무기의 위력 앞에 패한 후 사방으로 흩어졌고 해남에서도 동학교도들이 관군과 대결이 여기저기서 일어났다고 적고 있다.
청계면(계곡면 하부지역)에서 수백 명의 동학농민군을 뒤쫓은 일본군과 관군들이 쏘아대는 대포소리가 산천을 진동했다는 기록과 황산면 우항리 이재량참판과 마산 장촌리 민건호씨는 동학군에게 돈과 식량을 제공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음을 알 수 있다. 읍내 중심부에 자리잡고 천도교 교구는 많은 농민군을 배출시켰던 배후였다,  근․현대사의 큰 물줄기인 동학의 농민정신이 잊혀져 가고 있는 오늘날 이들의 정신을 다시 되짚어보는 것 또한 중요한 일이 아닌가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