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 복, 퇴계학을 전국에 전파하다

2012-07-27     해남우리신문

윤무지(해남윤씨 중앙종친회장)


행당 윤 복선생 탄신500주년 학술대회


지난 6월 7일 서울 중구 구민회관 대 강당에서 해남윤씨 종친 및 학계 인사 3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윤 복선생 탄신 500주년 제1차 학술강연회가 열렸다.
7월 6일에는 500여명의 해남윤씨 종친과 강진, 해남군민 그리고 경북 문화관광국장의 인솔 하에 참석한 도운회 회원 100여명 등 600여명이 강진군 아트홀에서 제2차 학술대회를 열었다.
제1차 학술대회는 문재구 박사의 ‘윤 복선생의 생애에 관하여’ 그리고 고려대 김언종 박사의 ‘퇴계와 행당의 교환과 그 역사적 의의’에 대해 각각 발표했다.
연사 문재구 박사는 퇴계 이황선생의 제자 후손들의 모임인 도운회 회장으로 ,이날 미리 배포된 학술지에서 윤 복선생의 업적을 연대 별로 간결하게 설명했다.
행당은 1512년(중종7년)에 해남현 동문(현재 해남읍 해리)에서 해남윤씨 어초은 윤효정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충청도 관찰사를 마지막으로 공직에서 물러나 해남읍 안동리에서 여생을 즐기시다 66세로 생을 마쳤다. 현재 강진군 도암면에 모셔져 있다.
윤효정의 광명지제로 장남 귤정공 구, 셋째 졸재 행, 넷째 행당 복이 문과에 급제하면서 해남윤씨가는 빛을 보게 된다.
이 가운데 윤 복의 사적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첫 외직으로 부안현감에 제수돼 흉년을 맞았으나 정성을 다해 백성을 규휼, 칭송하는 소리가 높았다. 중앙 정승의 부당한 청탁을 거절해 강직한 성품이「조선실록책훈록」에 기록돼 있다. 특히 낙안군수 재직 시에는 평소 백성과 함께 성곽을 보수하고 무기를 수선해 을묘왜변을 만났을 때 아무런 피해나 동요가 없었고 이에 방어사 남치근이 “옛 명장이라도 이보다 더 잘 할 수 없다”고 칭찬했다
54세 때는 안동대도호부사가 돼 퇴계 이황과 교우하게 된다. 이는 훗날 영호남 학문의 교류와 퇴계학이 전국 각처에서 불길처럼 번지는 계기가 됐다. 특히 62세(1573년) 되던 4월 18일 하루에 사예에서 사간원으로 배수하고 다시 통정대부 승정원 동부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 수찬관이라는 두 직급의 승진을 하게 되는 사연은 흥미롭다.
퇴계는 윤 복선생의 사람됨을 이조판서를 지낸 미암 유희춘에게 “진유아인”이라고 칭찬했다.
두 번째 연사 김언종 교수는 이황과 윤 복의 교환(서로 사귀어 즐김)이 영호남 학문교류의 원류가 되었고 퇴계학이 전국 각처에 전파되는 계기가 되었음을 강조했다. 제2차 강진 학술강연회에서는 도운회 회장 문재구 박사의 ‘퇴계와 행당 교유’에 대한 1차 학술대회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 했다.
특히 행당의 세 아들인 강중. 흠중. 단중과 생질 풍암 문위세와의 관계에서 퇴계학의 호남학파가 탄생했다고 강조했다.
두 번째 박석무 단국대 석좌교수는 ‘해남윤씨 귤정. 행당 가문과 다산 정약용’의 강연에서 호남인맥 금남 최 부, 미암 유희춘, 석천 임억령, 어초은과의 관계를 마치 그림처럼 알기 쉽게 설명했다.  그리고 퇴계학문의 호남일대 전파가 윤 복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강조할 뿐 아니라 다산학의 뿌리는 해남윤씨 집안임을 강조했다.
세 번째 연사 이종범 조선대 사학과 교수는 ‘행당 윤 복의 은자관료적 생애와 시대적 위상’에 대해 강연했다.
행당 복은 큰 형 귤정 구와 셋째 형 졸재 행 등과 문과에 급제해 관료 및 학자로서 해남윤씨 가문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됐다. 강진이라는 조그마한 지역에서 짜임새 있게 진행된 학술대회는 해남윤씨 종친들과 해남, 강진지역 주민들이 혼연일체가 돼 성대히 거행되었다는 사실이 한층 돋보이는 행사가 되었음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