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또 다시 그대를 부른다

2012-10-26     해남우리신문

김석천(해남동초 교사)


작은 섬들이 바다를 둘렀다. 그 섬들 사이를 헤집고 흐르던 바닷물이 협소한 지형에 이르러 좁은 길을 빠져나가느라 구르고 뒤집히며 소리를 지르기까지 하는 곳(鳴). 그래서 물살이 장관을 이루는 이 곳 명량(鳴梁)에 섰다.
이곳이 조선을 왜의 손으로부터 지킨 명량일진데 의미 없는 발걸음이 몇 번이었던가! 오늘 이 곳에 다시 서 있음은 파도소리가 좋아서가 아니다. ‘적이 적인가’ 라고 망루에 서서 긴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상황 속에서, 더구나 잔선 13척으로 누구라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을 그 때 필사즉생(必死卽生) 필생즉사(必生卽死)! 라는 기치(旗幟)를 걸고 명량의 거센 물살에 몸을 던져 조선을 구한 그를 조금 더 가까이서 보고 싶어 이곳에 섰다.
명량(鳴梁)!
좁은 해협을 빠져 나가는 물살이 바다 밑 바위를 거스르고 부딪치며 일어난 물회오리 소리가 20여리 밖까지 들린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장군은 이 명량에 조선의 운명을 걸었다.
해남 문내면과 진도 녹진을 잇는 325m의 바다, 폭이 좁아 시속 24km 이상이나 되는 거센 물살을 조선을 구할 지략으로 삼아 13척의 병선으로 왜선 133척을 물리치는 세계 해전사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전승(戰勝)을 거두었다. 그건 아무나 거둘 수 있는 전승이 아니었다. 자신의 생명을 걸었다. 부하들의 피를 뿌렸다. ‘죽기를 각오해라!’ 영기(令旗)를 들어 전진을 독촉했었다. 거센 물살 아래로 부하들이 처박히는 것을 보며 가슴을 쥐어짰었다. 당시 그의 앞엔 이런 저런 적들이 많았지만 그는 참 적을 향해 돌진했었다.
이충무공이 백의종군에서 풀려날 당시의 형편을  김훈의 칼의 노래의 한 대목에서 본다.
‘연안은 텅 비어있었다. 산하뿐이었다. 포구마다 전선 두어척이 뻘밭에 밀려와 쳐박혀 있었다. 수리해서 쓸만한 물건이 못되었다. 불타다 만 선체에는 널빤지 한 장 뜯어낼 것이 없었다.’
거의 모든 포구들이 왜선들로 가득해 있었다.
우수영에서 내 군사는 120명이었고 내 전선은 12척(?)이었다.
명량해전이 시작되기 전날 밤.
송여종은 말한다.
이제 배가 열 두 척이온즉…(칼의 노래에도 12척이라고 기록돼 있다)
안위가 말한다.
‘열 두 척으로 진을 짠다면 대체로 어떤…?
날이 밝자 명량에서 적을 맞았다.
나라가 반쯤 허물어진 이런 상황을 딛고 이 충무공은 13:133의 불멸의 해전사를 이뤄냈다.
명량은 세계 해전사의 메카이다.
명량이 그렇던가? 장소가 아니라 충무공이 그렇다. 사람이 그렇다.
1588년 칼레해전, 1805년 트라팔카 해전과는 비교되지도 않을 전승은 바로 장군의 가슴에서 부터 시작됐었다. 명량은 예나 지금이나 명량이며 바다는 지금도 그때처럼 소리를 질러댄다. 단지 명량에 서있는 사람이 누구인가가 다를 뿐이다. 오늘 명량에서 그 날의 이충무공을 다시 그려 본다.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이런 저런 난제로 흔들거리는 이 나라에 충무공처럼 살신성인(殺身成仁)할만한 사람이 필요하기에 두 손을 모아본다.
우리에겐 지금 사람이 필요하다.
불멸의 해전사를 재연하는 호국의 울돌목엔 그 때처럼  물비늘이 번뜩이고 물길은 머리를 쳐들고 서해로 치달으며 해거름은 바쁘기만 하다.
물회오리치는 바다 멀리서 약무호남시무국가(若無湖南是無國家)라는 충무공의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