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잘살려는 인간의 꿈도 인권의 바탕이다

2013-04-05     해남우리신문
봄인데 옷깃이 차다. 창밖엔 비가 내린다. 분명 봄비다. 청명-한식이 지나면 이삭이 팰 것이라는 소식이 들리는 올해 보리농사에, 이 비는 분명 자우(慈雨)가 되리라.
봄은 생명 있는 만물에 따사로운 입김을 불어넣고, 헐벗었던 가지에, 메말랐던 씨알에, 움츠렸던 길짐승과 날짐승에게 삶의 기능을 다시 회복시켜 준다.
사람들은 봄을 소생의 계절이라 해 반기고, 한해의 살림을 설계한다. 자고로 천부생무록지인(天不生無祿之人), 지부장무명지초(地不長無名之草)라 했다.
하늘이 이 세상에 사람을 낼 때 제각기 분복(分福), 먹을 것, 입을 것, 누울 곳을 물려줬다고 한다. 그래서 인간은 더 인간답게 알뜰히 살아보고 싶은 꿈을 설계한다. 이것은 바로 인권에 바탕을 둔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자 가장 소박한 욕구이다.
그러나 현실은 너무도 무정스럽다 언필칭(言必稱) 말하는 경제대국이며, 빛나는 민주공화국이며 정신적 광휘(光輝)가 이 매정스런 현실에 조금은 위안이 될까.
얼마 전「아버지가 오늘도 식빵 사왔네」「엄마는 왜 안 오나?」토막연필로 기쁨과 슬픔을 적어놓았던 어린 남매가 아비의 손에 의해 저승길로 떠나야만 했던 일을 기억한다.
또 하루가 멀다 하고 군사적으로 대처하는 남과 북 정국이 혼미(昏迷)하다. 이에 비례해 슬픈 사연도 날로 늘어만 간다.
외롭게 살아가는 독거노인과 정신적․육체적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장애인, 경제 자립능력이 없는 상이군경의 생활고로 인한 자살, 금전적인 상대적 박탈감과 물질적 가난에 쪼들려서 본의 아닌 범법(犯法) 등 이러한 현실 앞에 우리는 어떻게 손길을 내밀어야 할까.
그러나 한편에선「초등학교 급우들이 쌀 한 숟갈씩을 모아 어려운 반 급우들을 도왔다」「품팔이로 모은 돈을 불우한 사람들의 선도에 바친 목사가 있다」「점심을 서로 돌려가며 굶주린 학우에게 제공하는 미담」「이웃끼리 추렴하여 불구(不具)의 몸을 고쳐주었다」「월남전참전자가 집이 없어 마을 이웃들이 도와 새로운 보금자리를 지어주었다」는 소식들 접한다.
물론 중앙정부에서 일자리를 만들고 복지정책을 확대하면 더 나아질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대가 현실화되기까진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궁극적으로 나의 삶이 너의 삶이요, 그대의 삶 또한 나의 삶인 운명공동체의 주민으로서 우리 모두의 주민공동의 과제로 삼을 수밖에 없다.
진정 우리는 우리의 이웃이 굶주려서, 육체적․정신적으로 힘들고 외로워서 쓰러져가는 소식을 그대로 남의 일인 양 듣고만 있어야 할 것인가!
진정 우리는 우리의 이웃이 경제적인 상대적 박탈감과 심리적으로 가난에 쪼들려 몹쓸 악(惡)에 물들어가는 모양을 앉아서 보고만 있어야할 것인가!
어느 개인이라도 좋다. 어떠한 단체라면 더욱 좋으리라. 복된 내일을, 알뜰한 모래를, 희망에 넘치는 그 다음날을 기약하기 위한 우리의 삶이다.
그럼으로써 우리 모두가, 또한 우리 모두로서 얽힌 알찬 힘으로 모두의 꿈과 설계를 실현할 수 있다. 자우(慈雨)의 봄비처럼 따뜻하고 흠씬 한 주민애(住民愛)를 서로 고루고루 뿌려, 삭막한 이 세상을 흐뭇한 인정의 꽃으로 한번 수놓아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