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산왕국의 정체는 - 침묵하는 역사학계 -
2013-04-12 해남우리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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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편집자 열의와 달리 기초자료의 부족과 오류를 지적하면서 학계의 쟁점으로 남아있는 진실기피의 몇 가지를 소개하려한다.
하나는 倭 나라가 지금의 섬나라 일본을 지칭하는가? 두 번째는 해남. 영암, 나주, 영산 등 남도문화권, 혹은 영산강문화가 처음부터 백제의 통치를 받았던 영역인가, 그 전제를 검토하지 않고 역사를 자의대로 왜곡시켜서는 아니 된다. 오늘날 학자는 사서에 의존하던 시대를 넘어 유물 자료발굴로 물증을 확보하기 때문에 신중하게 처신한다.
한일학자가 공동집필한 ‘한일고대교류사’를 보면 중국 사서를 인용해 왜가 마한과 변진 남쪽에 위치한다(南與接倭) 하여 왜국의 한반도 정착설을 제시한다.
일제식민사관과 정면 대치하는 점에서 진일보한다. 마한이 남도의 영산강(미산강)을 지배하고 마한은 백제 온조에 의해 멸망하므로 자연스럽게 백제권으로 본 것은 속설이다.
식민사관의 원조 이병도의 주장에 감히 맞서지 못하다가 이덕일 젊은 사학자가 과감하게 도전한다. 그것이 유물발굴을 토대로 하는 물증이다.
나주 반남면 일대의 고분 발굴에서 나온 금동관, 금동신발, 곡옥, 숱한 옹관 등 이같은 묘장의 특성은 백제고분의 특성과 다른 것으로 6세기 초엽으로 추정하는 ‘아파트형’고분에서 확인한다. 그러니까 선사인이 영산강을 중심으로 중국과도 대외무역을 하며 신라 왕족을 볼모로 잡을 만큼 위세를 떨친 왜국이라는 사실인데 누구도 밝히기를 꺼린다는 점이다.
나주고분 발굴은 조선총독부의 조사위원회(1917~1918)가 구성되어 시작하고 반쪽자리 조사서에는 ‘왜인의 장법이다’는 결론 이외에 발굴이 중단되고 도굴꾼의 훼손을 방치하였던 것이다.
만약 왜인의 한반도 거주설이 사실이라면, 일본의 임나 경영설이 허위가 되는 것을 감추고 싶었던 것이다. 백제와 왜국 사이는 형제국이 아닌가. 즉 온조계가 아닌 비류계로 보고 지표조사를 통해 별도 국가가 존재함을 밝히려는 학자도 있다.
‘김성호 비류백제와 일본의 기원’은 백제가 망하자 천황이 즉각 구원병을 파견하고 ‘내 선영을 어찌 볼까’ 탄식하는 ‘고사기’ 기록이 나온다. 이점 고대 언어도 공용했으리라고 보는데, 3세기 경 왕인 박사가 천자문, 논어를 가지고 영암 다대포에서 출항하여 한자교육 보급에 힘쓴다. 그렇다면 왕인은 처음부터 일본어를 알고 있다는 가설이 생기는데 무리이다. 더욱 한자를 가르침에.
영산왕국이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정책에 밀리고 눌리어 살기 좋은 일본열도로 이주하고 백제에게 남도영역의 공백을 물러줌으로서 그 이후 백제의 관할 영토가 된 것이다. 현재도 구석기인이 살았던 유물이 계속 나온다.
고대의 묘장 풍습은 그 민족적 특성을 잘 반영한다. 신화적으로 풀이하면 타원형의 옹관은 여성의 몸체이자 큰 알, 자궁을 상징한다. ‘죽으면 다시 자궁으로 돌아간다’ 하여 엄청난 크기의 옹관을 제작하고 부장품도 같이 묻었다. 전방 후원이라는 무덤양식은 엄밀하게 네모진 사각형태라기 보다 경사진 모습이다. 경주 석굴암 구조처럼.
이는 어미의 생식기 모양을 상징한다. 풍수지리설이 한국에 들어오기 전에 고대인은 인위적으로 여성기를 모방한 음택을 조성한 것이 천원 지방분이다. 그리고 무덤주변을 장식하는 하니기와, 토제, 토우 등은 신령의 상징물이다. 그것이 일본으로 건너가 천황의 분묘양식 구조가 된 것은 이상할 것 없다.
일본 영토는 원주민을 내몰고 이주민, ‘기마민족’의 지배로 이루어진 나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