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교육의 역사
2013-06-17 해남우리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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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에 유학을 처음으로 들여온 사람은 근제 최윤옥과 강릉대도호부사 이영화와 그 일가들이다. 이들이 단묘손위와 때를 같이하여 해남에 정착하면서 유학이 들어오게 되었다. 이후 이러한 흐름은 금남 최부와 어초은 윤효정에게 이어지고, 윤효정의 아들 윤구에 이어 임억령, 유희춘, 백광훈, 박백응 등으로 이어지게 된다. 조선 중기 이후에는 고산 윤선도, 공재 윤두서, 초의선사 등과 같은 인물들을 중심으로 문맥이 이어진다. 조선말엽 근대문물이 들어오면서 유학에 대한 교육은 시들해지고 계몽사상이나 실학사상이 대두된다.
해남에는 교육기관으로 향교와 서당이 존재했다. 조선초기에는 해남향교가 교육을 담당했지만, 향교의 교육은 양반의 자제들만을 위한 제한된 교육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평민의 자제들도 교육을 받기를 갈망하였고, 조선중엽 이후에는 이들에게도 교육의 기회가 제공되는 서당이 많이 개설되었다. 서당에서는 한글 보다는 한문교육, 즉 유학을 위주로 하였고, 역사 또한 중국의 역사를 가르쳤다. 하지만 근대화가 시작되고 일제의 탄압을 받게 되면서 민족주의자들이 조국의 독립을 목적으로 민족 계몽사상을 보급하기 위해 개량서당, 야학당, 강습소, 간이학교 등을 개설하여 운영하였다.
해남의 인맥과 교육기관을 통해 해남교육의 흐름을 파악하였다. 그 결과 해남의 교육은 조선 초 유학이 처음 들어올 때부터 시작되었으며, 시대의 요구에 따라 그 양상이 변해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역사는 과거 사람들의 생활을 기록해놓은 것이기 때문에 광범위할 수밖에 없다. 문화, 교육, 인물, 종교 등의 모든 분야가 한데 뭉쳐 이루어진다. 그 중 한 분야인 교육에 대하여 살짝 맛만 보았다. 비록 ‘살짝’이지만 해남교육의 흐름을 맛봄으로써 내 고장 해남의 역사에 한 발자국 더 다가간 것 같아 기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