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이씨 이유식씨 소장자료 노비 매매문서 눈길
조선후기 자료 90점, 한국학호남진흥원에 관리위탁

여주이씨 이대휴 10대손인 이유식씨가 소장한 5살 어린이 매매문서, 손도장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여주이씨 이대휴 10대손인 이유식씨가 소장한 5살 어린이 매매문서, 손도장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남편을 여의고 흉년 때문에 5세의 막내딸을 10냥에 판 문서가 나왔다.
 여주이씨 이대휴 10대 장손인 이유식(63‧삼산면 창리)씨가 소장해온 문서에는 흉년 때문에 이생원댁에 돈 10냥을 주고 딸을 판 내용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문서에는 팔린 딸의 이름과 매매 장소에 동석한 딸의 오빠들 이름도 명시돼 있고 또 당시 도장 대신 사용했던 손도장도 선명하게 남아있다.
 문서내용을 요약하면 1878년 삼촌면 항리에 강씨라는 여인이 살고 있었다. 이 여인은 노비가 아닌 양인 신분이었다.
 그런데 흉년이 들고 남편까지 사망하자 자식 4명과 함께 먹을 것을 찾아 떠도는 걸인 신세가 됐고 아사지경에까지 이르게 됐다.
 이에 강씨 여인은 5세의 막내딸 오인순을 해남읍 백야리 이생원댁에 10냥에 판다. 여인은 갑술년생인 막내딸을 부득이하게 팔게 됐다며 이 아이가 이씨 집안의 영원한 귀속물이자 이 집안을 봉양하는 일에 사용하는데 동의한다며 손도장을 찍었다.
 아사지경에 있는 5세의 딸 아이가 비록 노비신세가 되지만 굶지만은 않을 것이란 어미의 아픔이 기록된 문서내용이다.
 매매문서에는 막내딸의 오빠인 오삼성과 삼석, 달석이 나오는데 큰오빠인 오삼성은 상중이라 서명하지 못하고 둘째와 셋째오빠는 어려서 서명을 하지 못한다는 글이 써 있다.
 또 매매문서 작성자와 3명의 증인 이름이 나온다. 흥미로운 것은 증인 중 한명은 상중이라 직접 서명하지 못한다는 글이 있다. 당시에는 상중에 문서에 서명하지 못했던 풍습이 있었던 것이다.
 조선시대 노비는 사사로이 매도나 매매를 할 수 없도록 그에 따른 서류를 갖춰 관청에 제출해야 했다. 여주이씨 문중에 남아있는 문서도 5세 아이에 대한 소유권이 이생원댁에 있다는 절차를 밟은 문서이다.
 양인신분인 5세의 딸을 흉년 때문에 노비로 팔아야 했던 1878년은 전세계가 엘니뇨 현상으로 전례 없는기근을 맞을 때이다.
 특히 조선은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는 등 어수선한 상황이었고 민초들의 삶 또한 궁핍했던 시기였다.
 여주이씨 집안에는 1729년에 작성된 재산상속 문서도 소장돼 있는데 기록순서에 큰딸 이름이 제일 먼저 등장한다. 이때만 해도 재산상속에 있어 아들딸 구별없이 똑같이 재산을 분배했고 그것도 태어난 순서에 따라 상속명록을 작성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문서이다.
 상속재산 자료에는 딸 대신 사위가 서명날인했는데 이는 당시의 풍습이 었다.
 상속재산 자료에는 상속할 노비부터 토지, 생활품 등이 세세히 기록돼 있어 서류 길이만 3미터가 넘는다.
 또 1740년 영조 때 이국환이 생원에 합격한 합격증서와 시험답안지도 남아있고 1829년 해남윤씨와 북일 갈두리 땅을 상호 교환한 문서도 남아있다. 소설 박씨전을 한글로 베낀 문서도 있다.
 여주이씨 이대휴 10대손인 이유식씨가 관리해온 문서는 총 90점으로 한국학호남진흥원에 5년간 기탁 관리키로 했다.
 한국학호남진흥원은 해남 여주이씨 소장자료는 당시 시대를 읽을 수 있는 자료로 가치가 크다는 입장이다.
 한국학호남진흥원 관계자는 특히 5세 딸을 노예로 파는 문서에 구체적인 이름이 기명돼 있는 것은 흔치 않고 재산상속 문서에 딸에게 줄 재산을 먼저 기록한 것도 매우 흥미롭다고 말했다.
 한편 여주이씨 이대휴 후손은 당시 해남의 부호였고 현재 백야리에 있는 민정기 가옥이 여주이씨 종가댁이었다. 가세가 기울어지자 여흥민씨 소유로 넘어갔다.
 민정기 가옥은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86호로 지정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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