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첩단 사건으로 생긴 마을
한 건물 나눠 2가구 거주


분명 한 건물인데 지붕색이 각각 다르고 건물도 절반으로 나눠져 있다. 마당은 벽돌담으로 정확히 2등분 돼 있다.
한 지붕아래 여러 가구가 거주하는 경우는 있지만 같은 건물을 2쪽으로 나눠 사는 경우는 찾기 힘들다. 그것도 한 건물의 지붕색이 각기 다른 집은 억지로 디자인한 경우를 제외한다면 전국에서 찾기 힘든 경우다.
산이면 신흥리(이장 박토성) 마을은 한 건물아래 두 집이 사는 동네로 출발했다. 어떻게 이런 마을이 탄생하게 됐을까.
1968년 7월 목포시 충무동 허사도 해안에 인분 운반용 선박으로 가장한 공작선이 침투한 사건이 발생한다. 출동한 군경은 합동작전으로 영암군 삼호면 가제산으로 도주한 2명의 간첩을 사살한다.
1971년 10월에는 신안군 소허사도에 간첩단 사건이 발생한다. 산으로 도주한 4명이 사살되고 간첩선이 나포된 사건이다.
이 사건은 언론에 보도되는 등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든다. 몇 명 살지도 않는 작은 섬들이 주요관심으로 떠오르게 되고 정부는 서남해안 바닷가에 살고 있는 주민들을 한곳으로 모아 거주케 한다.
당시 바닷가였던 산이면에는 외따로 떨어진 집들이 많았다고 한다. 이때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 정부는 바닷가 외딴 집들이 간첩들의 은닉처가 될 수 있다며 대대적인 이주정책을 취하게 된다.
지금의 산이면 신흥리도 당시 탄생된 마을이다. 1972년 지금의 신흥리 마을에 건물이 지어지는데 정부는 한 가구당 한 채를 지어줄 수 없어서인지 한 건물에 두 가구를 이주케 한다.
한 채당 16평인 한옥 벽돌건물, 16평의 건물을 각각 8평으로 똑같이 나누고 마당도 각각 80평씩 두 쪽으로 나눴다. 이때 신흥리에 총 8채의 가옥이 들어서고 외따로 살던 16가구가 새 집으로 이주해온다.
집안 구조도 마당도, 마당 한 켠에 있던 변소도 아파트 구조처럼 똑같이 생긴 집들이 해남에 등장한 것이다. 집안도 손바닥만한 마루에 큰방 작은방, 불을 떼는 부엌을 갖춘 똑같은 구조였다.
당시는 대부분 집들이 초가집에 흙집이던 시절이라 비록 8평의 집이었지만 한옥에 벽돌집은 현대식 집이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집들은 신흥리에만 탄생한 것이 아니라 산이면 흑두리와 부동리, 황조리, 화원 월산에도 있었다고 한다. 정부의 해안가 이주정책이 대대적으로 이뤄졌던 모양이다. 다만 다른 마을과 달리 신흥리는 이러한 정부의 이주정책에 의해 탄생된 마을이다.  
정부는 강제 이주조건으로 신흥리 주민들에게 새집과 함께 가구당 45000평의 야산을 줘 개간케 했다고 한다.  
한 지붕 아래 두 가구로 탄생한 신흥리는 이후 집 주인이 바뀌면서 지붕색도 각기 변하기 시작했다. 주인의 취향에 따라 또는 노후된 지붕을 각기 개량하면서 색도 달라지고 지붕 재질도 달라졌다. 마당을 더 넓히는 집도 생기고 마당에 창고도 들어서면서 다른 모습을 띠기 시작한다.
특히 옆집이 이사하면 반쪽 집을 사 한 집으로 사용하는 경우도 생겼고 두 집 다 이사해 버려 건물이 사라지기도 했다.
지금은 총 5채 중 세 건물만이 사람이 살고 있고 2집은 비어있다.      
마을사람들은 한 지붕 2세대 집을 새마을 집. 간첩단 사건으로 생긴 집이라 간첩단 집이라 부른다.
정부에 의한 바닷가 사람들의 이주정책은 고려말과 조선초에도 있었다. 이때는 왜구의 침탈때문이었다. 서해안 바닷가로 왜구가 자주 침범해오자 정부는 왜구의 침탈지를 아예 없애버린다는 이유로 바닷가 주민들을 육지로 강제 이주시켰다. 흑산도 사람들은 영산포로 이주하고 진도 사람들은 영암 시종으로 이주케 한 공도정책이었다.
1970년대에 이른 이주정책은 당시 자주 발생하던 간첩단 사건으로 빚어졌지만 정부에 의해 이뤄졌다는 점에서 600여년 전에 이뤄진 공도정책과 같은 선상에 있다.
신흥리 집 구조를 처음 접한 이들의 첫 반응은 얼마나 사이가 좋지 않으면 마당을 갈라놓고 사용할까 또는 두 가지 지붕색을 사용하는 독특한 사람들이 사는 동네라는 것이다.
물론 허사도 간첩단 사건으로 생긴 산이면 신흥리는 분단의 비극이 낳은 마을이다. 38선으로 나뉜 남북처럼 두 쪽으로 난 집과 색이 다른 지붕, 그러나 신흥리는 오순도순 이웃과 함께하는 마을이란다.                                  
김유성 기자/


**아래 사진설명


성동국씨와 김성식씨의 집은 한 지붕아래 있지만 마당 가운데로 벽돌담이 두 집을 갈라놓고 있다.


마을 입구에 있는 집도 지붕색이 다르다. 담 너머 옆집은 비어 있어 한 집만 지붕을 개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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