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남군이 우수영 선창가에 자리한 법정스님 생가터 매입을 서두르고 있는 가운데 이곳은 우수영에서 볕이 가장 잘 드는 좋은 터로 꼽히고 있다.

자칫 무소유 정신 훼손될 수 있다
해남군 다양한 의견 수렴 후 결정

지난 16일은 음력으로 무소유의 삶을 살았던 법정스님의 입적 5주기였다.
스님이 마지막으로 머물었던 길상사에서 추모법회가 열린 가운데 해남군은 법정스님 생가 터 매입을 서두르고 있다.
해남군은 우수영에 자리한 법정스님 생가를 매입해 스님의 무소유 정신을 기리겠다는 뜻을 밝혔다. 해남군이 매입할 면적은 991.7㎡(300평) 규모, 생가터와 함께 4채의 가옥 매입을 위해 토지 소유주들과의 만남을 진행하고 있다.
문내면에서도 2012년에 구성된 법정스님 생가복원 추진위원회가 활동하고 있다. 추진위원회도 해남군과 발을 맞춰 개인소유가 된 생가 터 매입을 적극 돕고 있다.


그러나 토지매입 후 법정스님의 무소유 정신을 어떻게 담을 것인가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다.
법정스님 생가복원 추진위원회는 생가복원을 원하고 있지만 해남군은 조심스러운 입장을 보이고 있다. 생가 복원은 이후 관리문제도 따르는데다 모든 지자체가 역사적 인물을 상징화하는데 있어 가장 쉽게 접근하는 것이 생가복원이기 때문이다. 복원된 모든 생가에서 보듯 사람이 살지 않는 복원된 생가는 관람객들에게 감동을 주지 않는다는 것도 한 몫하고 있다. 


따라서 군은 무소유를 상징하는 간단한 조형물과 함께 공원식 복원을 고려하고 있다. 자칫 잘못 접근했다가는 무소유의 상징인 법정스님의 정신을 훼손시킬 수 있다는 우려가 있어 조심스럽게 접근하겠다는 것이 군의 입장이다. 군은 토지가 매입되면 생가복원 문제와 함께 스님의 무소유 정신을 담을 상징물 등에 대해 군민들의 폭넓은 의견을 들을 계획이다.


법정스님 생가는 옛 모습이 사라져 버렸지만 문내면 선두리 마을에서 가장 좋은 터로 꼽히고 있다.
우수영 선창가와 가까이 있어 교통중심지인데다 양지바른 곳이어서 예나 지금이나 주민들이 볕을 쬐는 곳이다.
법정스님이 태어난 집은 초가삼간이었다. 초가삼간 앞에는 작은아버지가 운영하던 여객선 매표소가 자리했고 초가삼간에서는 법정스님과 할머니, 어머니, 작은아버지 가족이 함께 생활했다. 그러나 법정스님이 태어난 초가삼간은 현재 꽃밭으로 변했고 여객선 매표소는 슬라브 집으로 변해 타인의 소유가 된지 오래다.


법정스님은 이곳에서 1932년 2월 15일 태어났다.
외아들이었던 법정스님은 2~3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작은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자랐다. 우수영초 25회 졸업생이었던 법정스님은 6년제였던 목포상업중학교에 진학했다. 이후 교육제도가 중학교와 고등학교로 분리되면서 자연스럽게 목포상고에 진학하게 됐고 전남대 상대에 진학해 3년을 수료한다. 목포에서 학교를 다닐 때도 스님은 주말이면 고향인 선두마을에 내려와 매표소 일을 돕고 여객선으로 손님을 실어 나르는 종선의 노를 저으며 작은아버지 일을 도왔다고 한다.
법정스님이 목포로 진학하자 작은아버지는 모자를 위해 목포 대성동에 초가삼간을 마련해 준다. 이곳에서 법정스님 어머니는 하숙을 치며 법정스님을 뒷바라지 한다.


자신이 창건한 서울 성북2동 길상사에서 입적한 법정스님은 1954년 2월 15일 통영 미래사에서 당대의 고승인 효봉을 은사로 출가했다. 1973년 대한불교 조계종 기관지인 불교신문사 논설위원, 주필을 맡으며 함석헌, 장준하 등과 함께 민주수호국민협의회를 결성. 유신철폐 개헌 서명운동에 참여했고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으로 참여했다.
2003년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인 길상사 회주에서 물러난 후 무소유의 삶을 살다 2010년 3월 11일 길상사에서 법랍 55세, 세수 78세로 입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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