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동석(목포대 명예교수)

조선일보에 괴이한 요설이 올라와 있다. 남정욱 숭실대 문예창작학과 겸임교수의 글인데 툭하면 스미마셍 남발하는 일본인의 인사법을 비꼬면서 그것이 어떻게 20세기 중반까지  한국과 동아시아국가를 골병들게 한‘강요된 근대화의 희생양’을 만들었다고 사설을 늘어 놓는다. 그 가운데 몇 줄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일본은 동남아의 여러 나라들이 부러워하는 나라였던가. 아주 잠깐 그랬다. 개화기의 우리나라 지식인들은 서양의 문명으로 치장된 일본을 롤 모델로 삼았다. 그러나 진짜 잠깐이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도무지 문화라고 할 만한 게 없었다. 게다가 일본은 자기들보다 식민지가 수준이 높은 것을 두고 보지 못했다. 주변의 앞선 문화를 말살하기 위해 별짓을 다했다. 선순환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제국이 주변 나라들을 포용해야 한다. 일본은 그러지 않았다. 자기들은 일등 국민이었고 자기네가 점령한 나라들은 이등 국민이었다.


한 나라가 제국이 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요건을 충족해야 한다. 군사력, 경제력, 문화력이다. 군사력과 경제력은 저 혼자 노력해서 갖추면 된다. 그러나 문화력은 다르다. 주변의 나라들이 그 나라의 문화를 부러워하고 기꺼이 그 나라의 일부가 되기를 바라야 비로소 제국이 된다. 아테네가 그랬고 로마가 그랬으며 현재의 미국이 그렇다. 일본은 공동체의 이익을 우선하는 근대화를 추진했고 그 사이 자유로운 ‘개인’은 사라졌다. 그래서 ‘나’보다 ‘우리’를 더 앞세우며 툭하면 ‘스미마셍(죄송합니다)’을 남발하는 것이다. 칭찬할 일이 전혀 아니다.


남정욱은 어디서 역사공부를 했는지 모르지만 제국주의 개념을 크게 잘못 이해한다. 제국주의는 다른 말로 바꾸면 영토 확장주의, 침략주의를 의미한다.
서양에서 제국의 기원은 로마가 아니고 그보다 역사가 올라가는 알렉산더대왕의 동방원정부터다. 알렉산더는 마케도니아 출신으로 월등한 고대 그리스 국가를 합병하고 페르시아를 점령하고 인도 북부 간지스 지역까지 진출했는데 이는 경제력도 아니고 막강한 군사력이었다. 알렉산더 용병술은 신출귀몰해 프라나타스 영웅전에 오를 만큼 상찬의 대상이었으나 불행이도 30세 전후에 열병으로 병사한다. 그는 자신에게 신의 호칭을 소망했으나 제국의 영광을 오래 누리지 못한 채 단명한 셈이다. 그의 제국의 문화는 헬레니즘이라고 해 신성한 일등문화를 자처하고 주변의 아시아문화를 야만 바바리안으로 취급했다.


미국이라는 제국의 출발이 그러하다 아메리카 신대륙 발견의 작명이 그러하듯 원래 토착 원주민이 살고 있음에도 유럽인이 처음 찾은 것처럼 ‘발견’이란 말을 남발하고 인디언을 모두 영토 밖으로 몰아내거나 학살하고 법적으로 소유권을 발동하고 전쟁을 일으켜 독립국가 주인행세를 한다.
우선 고대노예제 사회를 복원하듯이 미국은  아프리카 원주민을 강제로 잡아 노예로 만들고 임금착취의 노동을 혹사, 부강한 산업사회 자본주의 기반을 닦는다. 여기에 중국, 한국, 일본 등 아시아 이주노동자가 크게 기여한 사실은 미주이민사가 잘 보여준다. 미국에서  흑백 차별 인종차별은 제국의 태생적 특성이다. 스미마셍 연발의 일본 근대화는 미제국주의를 추종하려다가 가공할 핵폭탄 투하와 위협에 굴복한 셈이며 일제가 식민지화한 한국을 분할 점령, 일세기 가깝도록 속국으로 만든 후 미국문화의 우수성을 주입하고 수용하도록 식민문화를 심어줬다. 그것은 교육, 철학, 경제, 정치, 문화 예술 등 영향을 끼치지 않는 것이 없다. 미국에 유학갔다 온 지식인이 출세할 수 있는 지름길이 대학교수를 보장하는 것이며 한국의 상류사회 편입이다.


자칭 철학자 행세를 하는 김용옥이 입만 벌이면 자신이 하버드대학, 동경대에서 석박사 받은 사실을 자랑하는 것은 한낱 식민지 지식인의 가련한 실토이다. 어디 그 사람뿐인가.
나주시에 본부를 둔 영상자료원에서 본인을 취재하려온 젊은 지식인들과 나눈 자리에서 ‘우리가 미국식민지 백성이란 사실을 아는가? 우리가 이를 벗어나지 못하면 우리 지성은 스스로 기만하는 삶을 살 것이다.’ ‘남한사회에서 진보, 보수, 여당, 야당 가름하는 논쟁은 모두 헛짓이야’했더니 ‘선생님은 이상주의자십니다’라고 답변한다. 그렇다면 그대들은 현실주의 삶으로 만족하면서 살겠다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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