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석천(전 해남동초 교사)

삼일절에 TV에서 방영된 ‘명량’이라는 영화를 다시 보았다.
영화이기에 약간의 픽션(fiction)이 가미됐다 할지라도 ‘명량’은 몇 번을 보아도 감동적이다. 그건 명량해전이 133대 12라는, 피아(彼我)의 전력이 비교가 되지 않는 최악의 조건에서 이뤄낸 세계 해전사에 길이 빛나는 전승이어서만은 아니다. 이순신 장군이 330m 울돌목 명량해협에 생사와 존망을 걸었던 이유가 오직 충(忠)이었기 때문이다.
그도 인간이었기에 두려움과 극도의 불안과 심리적 압박감으로 식은땀을 흘리는 날이 있었다. ‘적(敵)이 적인가’라는 그의 탄식처럼 적의(敵意)가 뒤섞인 혼돈의 와중에서 고민하고 눈물을 흘렸던 분이셨다. 
이순신의 이야기를 소설화한 김훈의 ‘칼의 노래’의 몇 페이지에는 당시의 혼란했던 형편과 이충무공의 뒤채이던 가슴을 잘 표현하고 있다.
‘서로 알지 못하는 적의(敵意)가 바다 가득히 팽팽했으나 지금 나에게는 적의만이 있고 함대는 없다.’ 죽은 자는 죽어서 그 자신의 전쟁을 끝낸 것처럼 보였다.’ ‘나는 나의 충을 임금의 칼이 닿지 않는 곳에 세우고 싶었다.’
이충무공은 방책(方策) 없는 현실에 개의치 않고 오로지 자신의 길이 충(忠)이라는 신념으로 묵묵히 제 길만을 걸어간 가슴이 남다른 영웅이었다.
‘백성이 있어야 나라가 있고 나라가 있어야 임금이 있는 법이지.’ ‘장수된 자의 의리는 충(忠)을 좇아야 하고 충(忠)은 백성을 향해야 한다.’
명량의 중심 대사인 忠(충)의 한자적 의미는 사방을 두른 담 안에 물건을 넣는 모양의 ‘中(중심)’에 ‘心(마음)’을 두었다는 뜻이 아니던가!
이충무공은 헛된 것들을 바라보며 싸우지 않았다. 그의 중심에는 언제나 백성이 자리했다. 백성은 그가 싸워야 할 이유이며 궁극(窮極)이었다.
선조실록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이순신의 전사 소식이 전해지자 호남의 백성들은 통곡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일편단심 충성스러운 마음을 나라 위해 바쳤고 한 몸을 아낌없이 의리 위해 바쳤으니 비록 옛날의 훌륭한 장수라 하더라도 그보다 훌륭하지는 못할 것이다.’
장수의 눈이 백성을 향할 때 백성의 눈 역시 장수를 향했다. 위민(爲民)과 충은 맞닿아 있다. 백성과 함께 공감(共感)하고 공명(共鳴)함이 충(忠)이며 민본(民本)일 것이다.
영화 ‘명량’을 몇 번을 보아도 감동하고 공감함은 그 작품성이라기보다는 성웅 이순신과 같은 민본(民本)의 러더십을 갈망하기 때문일 것이다.
명량해전 그 이후…
400년여 년이 지난 오늘도 명량의 물살은 그때처럼 거칠다. 이 땅은 회오리처럼 혼돈(混沌)하고 갈등으로 팽배해 있다. 민심은 분열되고 충(忠)과 의(義)로 포장돼 무엇이 진실인지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안갯속 같은 싸움이 계속되고 있다. 더구나 임진란(壬辰亂)의 그때처럼 적의가 팽배한 위국(危局)이다.
공감(共感)과 공명(共鳴)이 없는 싸움의 실체는 무엇인가? 그 싸움의 실체가 오로지 백성을 향한 충의 싸움이 아니라면, 혹여 그것이 자신에게만 의미를 둔 싸움이라면 그 싸움은 헛것이다. 그런 싸움을 바라보고 있어야 하는 백성의 한숨은 길고 주름은 깊어간다. 충이 충 되지 못함이 작금(昨今)의 비극일 것이다.
‘국민(백성)을 위해’라는 말이 허언(虛言)처럼 들리는 이 시대에 마음의 중심에 백성을 품은 이가 어디 없을까? 충(忠)은 현시대의 요청이며 리더십(readership)이다.
지금 충(忠)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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