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 영 자(편집국장)

일본인 사와무라 하치만타로(澤村八幡太郞, 1898~1988)는 일제강점기 때 해남에서 순사를 지낸 인물이다. 그는 ‘문록(文祿) 경장(慶長)의 역(役)’이라는 부제가 붙은 유고집을 남겼다.
유고집에는 삼산면 평활리 왜군 포로수용소와 송지 어란의 어란이야기가 게재돼 있다.
삼산 포로수용소에 대해 그는 임란왜란 당시 고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 예하의 일본수군들이 조선군의 포로로 잡혀 대둔사 근처에 수용됐다는 기록을 남겼다. 그가 남긴 내용이 전해지자 해남에선 한때 이를 정설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고니시 유키나가는 제2차 전쟁인 정유재란 때 칠천량 해전에서 승리한 후 육지로 올라가 남원성과 전주성을 함락하고 충청도 직산까지 진격하지만 명량해협에서 왜수군이 이순신에게 격파당하자 협공을 우려해 순천으로 퇴각한 후 왜성을 쌓고 장기농성에 돌입한 이다. 따라서 고니시 유키나가의 예하 수군들이 해남에서 포로로 잡힐 가능성은 없다. 또 민족의 사활이 걸린 전쟁에서 조선이 일본 포로들을 수용할 수용소를 지을 여력이 있었겠느냐이다. 당시 해남현감이었던 유형은 이순신의 휘하에서 전투를 했으며 노량해전에도 참전했다.
또 임진왜란을 통틀어 조선에 왜군 포로수용소가 건립됐다는 기록은 그 어디에도 없다. 그토록 중요한 왜군 포로수용소가 해남에만 유일하게 존재했다면 지역에 회자됐을 것이고 학계의 조명도 받았을 것이다.
사와무라 하치만다로는 어란에 대한 내용도 유고집에 남겼다. 그는 유고집에. ‘명량해전에서 일본이 대패한 이유는 ‘고니시 유키나가 군대의 장수 ‘간 마사카게(菅正陰)’가 어란진에서 이순신의 간첩인 어란이라는 여인과의 꿈같은 사랑을 나누던 중에 일본 수군의 출발 날짜를 누설했고 이로 인해 왜군은 이순신에게 대패하고 그는 명량해전에서 죽었다는 것이다. 이에 어란 여인은 사랑하는 이에 대한 죄책감과 그리움으로 바다에 투신했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위에서도 밝혔듯 고니시 유키나가의 휘하 장수들은 명량해전과는 관련이 없다. 특히 일본의 군대는 조선과 다르다. 왜군은 다이묘의 영토를 경작하거나 그로부터 봉록을 받은 사병들로 편성되기에 다이묘를 떠난 다른 장수의 휘하에서 전투를 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어란 여인이 실존 인물인가에 대한 논란은 2008년도부터 시작됐다. 2008년 해남군이 마련한 간담회 자리에서 이준곤 목포해양대 교수는 설화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 수년 동안 꾸준히 이어져 와야 하는데 어란 여인에 대한 설화 내용이 어란 마을에는 없다는 것을 들었다. 이어 우리나라는 기록문화가 대단히 발달한 나라이기에 어란이라는 여인이 실존인물이라면 어디엔가 기록의 흔적이 남아있을 것이라며 문화콘텐츠는 탄탄한 구성력이 필요하며 그렇지 못할 경우 계속해서 찬반여론이라는 소모적인 부담을 안게 된다고 밝힌 바 있다. 따라서 어란이 실존이 아닌 일본순사의 창작물이라면 하나의 역사에 픽션을 가미한 문학으로 봐야한다는 것이다.
일본 순사가 남긴 어란 이야기, 이젠 그 여인을 기리는 노래까지 나왔다. 일본 순사의 창작물로 어란을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러나 어란 여인을 현존 인물로 주장할 경우 지역에서의 소모적인 논쟁은 지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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