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석 천(전 해남동초 교사)

바람에 취한 갈대가 비틀거리고 수면을 훑는 소슬바람이 울돌목 좁은 바다에 거칠게 부딪치는 이맘때면 ‘명량대첩축제’가 열리고, 잊고 있던 이순신이 되살아난다.
풍전등화 같았던 위기 상황에서 울돌목의 거친 물살에 사(死)와 생(生)의 결단을 내렸던 분, 왜군을 막을 수 있는 마지막 보루를 명량이라는 사지에 두고 필생즉사 필사즉생(必生卽死 必死卽生)을 방책으로 나라를 구했던 분, 13대 133이라는 비교 불가한 상황에서도 선두에서 적선을 향해 돌진했던 충으로 무장한 그분이 말이다.
그때에도 조정(朝廷)은 지금처럼 시끄러웠고 뒤엉켜 있었다.
당시, 선조 즉위 이후 사림의 득세로 격화된 붕당정치는 내부 균열로 이어지고 나라를 더욱 혼란에 빠뜨렸다.
나라와 백성의 안위보다 정쟁에만 몰두해 있던 대신들과 임금의 안일한 판단이 전쟁의 칼날 앞에 조선을 무방비로 서게 만들었다.
정유년 4월 초하룻날, 의금부에서 풀려난 이순신의 문초 내용을 김훈은 ‘칼의 노래’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그들은 헛것을 쫓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언어가 가엾었다. 그들은 헛것을 정밀하게 짜 맞추어 충(忠)과 의(義)의 구조물들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그들은 바다의 사실에 입각해 있지 않았다.」
충(忠)과 의(義)의 구조물은 권력자들이 기거하는 조정에서 혹은 실적을 드러내기 위해 문초하는 자들의 손에서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은 다시 바다에 선다. 전선(戰船) 없는 장수였던 이순신의 장계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지금 신에게 아직 열두 척의 전선이 있으니 죽을힘을 다하여 막아 싸운다면 능히 대적할 방책이 있사옵니다.”
그가 다시 바다에 선 이유는 백성이었다. 백성만이 그의 충의 대상이었다. 그런 까닭에 그는 바다에 섰고 바다에서 승리를 했고 바다에서 생을 마쳤다. 릴케의 말처럼 과일처럼 성숙해 떨어지는 죽음이었기에 아름다웠다.
우리가 그를 그리는 것은 이순신의 이순신다움 때문이다. 조정의 시끄러움에도 아랑곳하지 않았고, 권력 앞에서도 고개를 숙이지 않았으며, 말잔치 대신에 전장에서 몸으로 나라를 구했기 때문이다.
그 후 400여 년…
지금도 여전히 조정은 시끄럽다. 국민은 안중에 없는 듯하다. 불통의 시간이 이미 오래다. 벼슬자리에 오른 자들은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와는 거리가 멀게 느껴지고 ‘나는 바담 풍(風) 해도 너는 바람 풍(風) 하라.’며 부끄러움을 모른다. 정도(正道)는 권력에 가려져 있고 지도자들의 양심은 흐느적거린다. 임진란이 일어날 당시에도 명과 왜 사이에서 길을 잃었듯이 오늘도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서 부대끼고 있다. 해결되지 않는 난제가 수두룩한데 집안싸움은 날마다 더해가는 위기다.
권불십년에 화무십일홍(權不十年 花無十一紅)이라는데.(십년 가는 권세 없고 열흘 붉은 꽃이 없다)
명량의 물살은 오늘도 그때처럼 거꾸로 뒤채이며 울어대고 있다.
명량에 설 때면…
시끄러운 조정, 난제로 흔들리는 조국으로 인해 이 충무공이 사무치도록 그립다.
지금 우리는 임금 앞의 충이 아닌 ‘백성이 충의 대상’이라는 말을 꿈에라도 듣고 싶다.
오늘도 이 충무공이 살아있는 것은 더 그런 이유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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