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 재 갑(전 해군 군수사령관)

병진소란 지금으로부터 400년 전인 병진년(1616년, 광해군 8년)에 고산 윤선도 선생이 30세의 포의(布衣) 신분으로 예조판서 이이첨 일파의 국정농단에 대해 임금에게 직소한 상소문을 일컫는다.
필자는 예편 후 윤선도 평전(고미숙: 한겨레출판사)을 접했다. 지금 생각하니 오늘날과 너무나 닮은 상황이었고 여기에 고산 선생의 고뇌에 찬 결단과 고행을 느낄 수 있었다.
400년 전 그때도 오늘날 최순실의 국정농단과 유사하게 임금께 올리는 모든 구두 보고와 서면보고는 이이첨을 경유해야 했다. 이이첨의 네 아들이 과거시험에 부정합격한 것도 최순실 딸의 일류 사립대 입학과 빼닮았다. 최순실이 행여 이이첨에게서 배우지 않았나 하는 엉뚱한 생각마저도 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고산 윤선도선생을 유학에 빠진 나약한 문인정도로 인식하고 있을지 모르겠으나 고산 선생은 시조시인으로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한 문학가였을 뿐 아니라 불의에 저항한 정치가였다. 또한 그의 시호 충헌(忠憲)에서 알 수 있듯 병자호란 시 의병을 규합, 해남에서 해로를 이용해 강화도에 이르렀다가 임금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실망한 나머지 제주도로 향하다 지금의 완도 보길도에 정착했다.
고산 선생은 17세에 진사초시에 합격했으며 20세에 승보시 장원과 26세에 진사시 장원에 합격한 신진 엘리트 관료였다. 그러나 성균관 유생 신분으로 자신의 출세나 안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불의에 항거한 결과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됐다가 경상도 기장으로 옮긴 이래 그의 생애 중 17년여를 유배생활로 보내게 된다. 유배생활로 정치가로서의 꿈은 키우지 못했지만 대신 찬란한 시조문학을 꽃 피웠으니 정치적으로 높은 자리에 오른 것보다 더욱 빛난다 할 것이다.
지금 우리의 현실은 녹록지 못하다. 첫눈이 내린 지난 토요일, 젊은 청춘들은 첫눈의 낭만과 축제보단 광화문 광장으로, 전국의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첫눈을 맞으며 박근혜 대통령의 하야를 외쳤으나 청와대의 반응은 진중하게 받아들인다고만 하니 답답하다.
청와대의 비서진들과 정부 각료 장관들은 나름 엘리트들일 텐데 고산 선생 같은 진언을 하는 사람 하나 보이지 않으니 이는 지나친 출세위주와 보신주의 탓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물론 대통령을 비롯해 정정당당한 출세와 자리보전이라면 권장할 만한 일이겠으나 남을 짓밟고 거짓말하고 내가 이 자리를 물러나면 어느 세월에 이만한 자리에 오를 수 있겠는가 하는 복지부동한 것이라면 이 나라와 국민은 너무도 불행하다. 나아가 그 자리에 있을 때 나와 내 주변 사람들에게 한 몫 챙겨줘야 한다는 생각으로 버티는 것이라면 더 큰 불행이 아닐 수 없다. 하기야 최순실의 딸은 ‘부모의 재산도 능력’이라고 말했다. 벼슬도 돈으로 사고 승진도 돈으로 사서 시끄러운 세상이니 누구를 탓하리오 마는 국가경영을 위탁받은 대통령과 국가 지도자급에서 만큼은 노블레스 오블리쥬를 기대했던 서민들은 허탈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이 나라에 정의가 살아있고 언론매체가 사명을 다하고 있으며 SNS 등을 통한 정보가 실시간으로 교류되고 있어 승리는 국민 앞에 있다고 본다. 어둠이 짙을수록 아침은 더욱 밝게 빛난다고도 하고, 겨울이 추우면 봄이 멀지 않다고도 하듯 대통령이 아무리 버티어도 그 끝은 멀지 않다. 여야 수뇌부는 부화뇌동하거나 당리당략에 몰두하기보다는 대한민국의 안위와 미래를 염두에 두고 사태를 해결해 나가기를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당부해둔다.
해남윤씨는 물론이고 해남에 거주하는 군민들은 우리에게 고산선생과 같은 인물이 있었음을 긍지로 삼고 우리 고장만이라도 대한민국에서 제일가는 청렴하고 깨끗한 지역을 만들자고 호소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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