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석 천(전 해남동초 교사)

안톤 슈낙(Anton Schnack)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라는 시가 생각난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느낄 수 있는 슬픔의 편린들, 삶의 허무감에서 피어오르는 우수를 서정적인 언어로 노래한 안톤 슈낙은 1941년 산문집 ‘젊은 날의 전설(Jugendlegende)’을 발간하면서 이 글을 첫머리 작품으로 실었단다.
「울음 우는 아이들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정원 한편 구석에서 발견된 작은 새의 사체 위에 초추(初秋)의 양광(陽光)이 떨어져 있을 때, 대체로 가을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이하 생략)」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이 어찌 슈낙의 가슴뿐이랴.
겨울의 초입(初入)이다. 영하의 추위에도 어둠을 몰아내기 위해 촛불을 켜야만 하는 나라의 현실이 나를 슬프게 한다. 뉴스를 듣다가, 신문을 보다가 어디 한 곳 성한 곳이 없는 이 땅을 아들딸들에게 물려줘야 한다는 아픔이 나를 슬프게 한다.
세월호가 침몰해 가던 시각에 국민의 생명을 보호할 책임이 있는 대통령이 한가로이 머리 손질이나 했다는, 자꾸 부정하고 싶지만 부정할 수 없는 보도에 슬퍼진다.
‘그것이 알고 싶다. 세월호의 진실’이라는 플래카드의 빛이 바랜 지 오래인데 하늘나라 우체통에 편지를 넣는 이들을 보며 슬퍼한다.
우린 왜 점점 행복해지지 않는 걸까? ‘국민행복 시대’를 표방했던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한국의 행복순위가 2013년 41위에서 2016년에는 58위로 지난 3년 동안 17단계나 뒤로 밀렸으며 행복 결핍뿐만이 아니다. ‘행복불평등’의 골이 깊다는 소식이 나를 슬프게 한다.
‘국민, 국민을 위한다.’는 구태의연한 구호가 현실과는 괴리(乖離)가 있음에, 그들의 거짓된 입과 허물어진 양심을 보고 나는 슬퍼한다.
이 땅에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를 물고 태어난다는 이 나라의 현실, 흙수저 안에서도 또다시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층층이 계층구조를 이루고 갈수록 심화되는 빈부의 양극화 현상을 보며 슬퍼한다.
‘청백전(청년백수 전성시대)’ ‘이구백(20대의 9할이 백수)’ ‘N포 세대(무한대 포기 세대)’ 등의 신조어가 말해 주듯이 우리 아들딸들이 심각한 청년 실업 문제 속에서 희망을 잃어 감을 슬퍼한다.
한국인 마음 온도는 영하 13.7도, 취준생은 영하 20.7도라는 강추위에 떨고 있다는 신문의 제목을 보며 슬퍼한다. OECD 국가 중 부끄러운 ‘최고’ 항목이 많음을 나는 슬퍼한다.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가 원칙 없는 정치, 일하지 않고 누리는 富, 양심 없는 쾌락 등 일곱 가지를 죄악으로 꼽았는데 그것들이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음을 슬퍼한다.
위안부 피해자들과 국민이 극구 반대하는 한일 위안부 문제를 너무도 쉽게 합의한 정부를 보고, 지금도 대사관 앞에서 떨고 있는 소녀상을 보고 슬퍼한다.
다니엘 튜더가「익숙한 절망, 불편한 희망」이라는 책에서 한국사회는 '희망, 꿈, 변화' 등의 단어로 도배됐지만 누구도 그 말을 믿지 않을 만큼 불신과 피로감은 극에 달했고 '희망을 이야기하기보다는 오히려 절망에 익숙해져 있는 사회'라고 진단했다는데 그의 말을 부정할 수 없음을 슬퍼한다.
어디 이런 슬픔들이 나만의 것이겠는가? 슬픔과 분노는 종이의 앞뒤면 같은 것이다. 슬픔 뒤엔 삭이지 못한 분노가 있고 분노 뒤엔 슬픔이 숨어있을 뿐이다. 슬픔과의 응전(應戰)을 원치 않는 무위(無爲)가 나를 슬프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라볼 하늘이 있고 맨발로 밟을 땅이 있기에 내일은 더 좋은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 때문에 숨 가쁘게 달려가고 있는 것이 더 슬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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