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석천(전 교사)

사람의 행동이나 말이 마음을 움직일 때가 있다.
그건 그 사람에게서 진정성이 느껴질 때다.
세상이 참 냉랭해졌다.
지극히 무감각하며 각박해서 호의를 베푸는 것 자체도 조심스러운 세상이다. 
이런 분위기는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서 몇십년을 살아온 사람의 편견이길 바란다. 요즘은 학교에서 아이들을 대할 때도 여간해선 신체 접촉을 하지 않는다. 머리조차도 쓰다듬어 주지 않는다. 
십여 년 전만 해도 아이들이 대견한 일을 했을 때 엉덩이를 토닥거려주며 칭찬을 해주는 것이 칭찬의 미였는데 요즘은 자칫하면 추잡한 행위로 오해받기 쉽다. 아이들의 손을 잡는 것조차도 관점에 따라 오해의 소지가 있다.
어디 그뿐이랴. 요즘은 온전히 편한 사이가 아니면 속내를 감추고 사는 것 같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지 않고 사는 것이 오히려 편한 세상이다. 그래야만 나의 흠집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김영란법이 시행된 뒤로는 사람의 마음마저 더 각박해졌다. 서로 마음을 나누며 차 한 잔을 마시지 못한대서야 원!
이대로 한 세대가 흘러가면 우리 아이들이 성인이 될 시점의 세상은 사막으로 변할 것 같아 염려스럽다.
세상이 아무리 그럴지라도 사람의 진정성은 이심전심으로 통하는 법이다.
어떤 분이 이런 메시지를 보내왔다.
“혹 도시락을 싸 오지 못할 형편인 아이들이 있나요?”
“혹 내가 도와주어야 할 아이들이 없을까요?”
사람은 사이의 존재라지. 
오랜만에 그분의 말에서 사람의 온가를 느꼈다. 
누군가 그랬던가 싶다. 사랑한다는 것은 그의 심장에 내 심장을 갖다 대는 것이라고. 무심한 세상에서 누군가와 감정의 주파수를 공유한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위안이 되는지.
작은 불꽃이 어둠을 밝히듯 격려하고 지지하는 말들로 인해 세상은 온기를 찾게 될 것이다.
혹여 누군가의 정성이나 성의가 동정으로 오해되기도 하는 세상, 이런 세상을 우리 아이들에게도 이대로 물려주어야 한다는 말인가?
우리는 이 답답한 벽을 넘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 안타까운 마음으로 아이들을 바라본다.
‘저들이 살아갈 세상은 사막일 텐데…’
요즘 공감이나 공명, 배려 등의 말이 나오게 된 것도 이런저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적자생존에 지친 인류에게 새로운 패러다임은 공감이나 공명일 것이다. 
공감-함께 느끼다.
공명-함께 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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