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제품 수리의 귀재 광훈전자 故정광훈
80~90년대 한국 농민운동사의 중심인물

 

▲ 겸손과 청빈, 청년같은 열정으로 살았던 고 정광훈 의장의 제6주기 추모제가 지난 13일 광주 망월동에서 있었다.

 영원한 민중의 벗 정광훈, 그를 기억하는 이들은 전자제품 수리의 귀재이자 그 방면의 신화적 존재였다고 밝힌다. 
라디오 시대, 그 사이로 간간히 눈에 띄던 흑백 TV. 70년대인 이때 그는 해남읍에서 입체소리사라는 전파사를 운영했다. 드라이버 하나만 있으면 못 고치는 것이 없을 정도로 천부적 재능을 지녔던 그의 가게엔 고장 난 라디오와 흑백 TV가 언제나 쌓여있었다.
이후 그는 삼성생명 앞과 홍교다리 인근에서 광훈전자를 운영했다. 칼라 TV가 등장했던 이때도 그의 손길은 바빴고 특히 외제오디오는 그의 손을 거치지 않으면 고칠 수가 없었다. 당연히 그의 가게는 항상 붐볐다. 
박상일(전 해남군지역혁신협의회 의장) 씨의 회고이다. “TV가 한창 보급되던 때, 해남은 난시청 지역으로 TV를 제대로 감상할 수가 없었다. 
해남읍 유지들은 전자기기의 천부적 재능을 지닌 그에게 TV 한 번 제대로 볼 수 없느냐고 청을 했고 이에 그는 유지들의 도움을 받아 목포와 잘 통하는 300m 높이인 금강산 형제바위 인근에 TV기지국을 세웠다”고 회고했다. 금강산 형제바위 인근 TV기지국은 두륜산 중계탑의 KBS와 MBC 기지국 이전인 80년대 초에 세워졌다. 그러나 해남읍민들을 위해 세운 금강산 TV기지국으로 그는 국제전파관리법 위반으로 벌금형을 받았다고 한다.

 워낙 손재주가 좋아 수입도 좋았다. 손재주 때문에 항상 많은 현금을 만졌지만 그는 돈을 모을 줄 몰랐다. 이미 그는 농민운동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루 수입이 생기면 민주화 운동에 헌신하던 이들에게 술과 밥을 사주는데 바빴다. 따라서 그의 가게는 운동권에 몸 담은 사람들의 거점지였다. 또 그는 수익금으로 전국을 누비며 사회운동에 헌신했다. 따라서 가게를 비우기 일쑤였다. 
사진작가 천기철 씨는 당시 정광훈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 농민운동으로 출장을 갔다 가게에 돌아오면 “기철아 오늘 몇 대 들어왔냐”라고 물었고, 들어온 제품들을 순식간에 고치는 재능을 보였다고 말했다. 또 하루 현금이 10만원 들어왔다면 그날로 사회운동하던 선후배들의 술과 저녁밥으로 지출했다고 덧붙였다.  

 그는 평생 풍족함이라는 것을 모르는 남에게 나눠줄 줄만 알았던 사람이었다. 
전파사를 운영했던 그는 1977년 김남주 시인과 소설가 황석영 씨를 만나면서 본격적으로 농민운동에 뛰어든다. 80년 5․18때는 전남기독교농민회 총무를 맡았고 84년에는 민중교육연구소 교육부장을 맡아 미국농수산물 수입 반대에 나선다. 92년에는 농민대회 주도로 수배 중 구속돼 4년간의 수감생활을 하고 2000년에는 전국농민회총연맹 의장의 몸으로 부시방한 반대 투쟁을 주도한 혐의로 영등포구치소에 또다시 구속 수감된다. 2002년에는 전국농민대회와 관련해 투옥이 됐고 2007년에는 한미FTA 저지 투쟁과 관련해 투옥되면서 4차례의 투옥생활을 한다.
옥천면 송운리 출신인 그는 198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한국 농민운동의 중심에 서 있었던 인물이다. 또 80년대와 90년대 가장 인기 있는 아스팔트 위의 대중연설가였고 세계를 무대로 농민운동을 전개한 이였다. 2003년 WTO 칸쿤 회의를 반대하기 위해 한국투쟁단 대표로 출국했고, 2006년에는 WTO 반대 홍콩민중투쟁단 대표를, 2006년에는 한미 FTA 저지 미국원정투쟁단장을 맡아 해외운동을 주도했다. 늘 청년처럼 열정이 넘쳤고 권위의식이 전혀 없었던 민중의 벗, 그는 청빈한 삶을 산 지도자로도 기억되고 있다. 

 그는 번번한 땅 하나 집 하나 남기지 않았다. 2010년 귀향을 앞두고 후배들이 집을 사라며 모아준 돈도 모두 동지들에게 다시 나눠줬다. 겸손과 청빈, 청년 같은 열정과 낙천적인 성격은 그가 떠난 후에도 매년 5월 추모제만 되면 그를 기억하는 이들이 모여 그를 다시 불러내고 있는 이유이다.
‘故 정광훈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 의장의 제6주기 추모제가 지난 13일 광주 망월동 민족민주열사묘역에서 열렸다. 
추모제에는 박석운‧한충목 진보연대 상임대표 등 생전의 그를 기억하는 200여 명이 참석했다. 한편 정 의장은 지난 2011년 4월 민중노동당 화순 재보궐선거 지원 유세를 마치고 해남으로 돌아오던 길에 교통사고를 당해 그해 5월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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