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민 1만원 참여로 추모조형물 건립운동
황산, 문내 사회단체 참여의사 속속 밝혀

 

 일본의 패색이 짙던 1945년 초, 일본군은 만주의 관동군과 한반도, 일본 본토의 병력을 제주도로 이동시킨다. 일본 본토로 진격해오는 미군을 제주도에서 막기 위해서다. 또 이 시기 제주도 곳곳에 군사시설을 구축하기 위해 전국의 노무자들을 강제 동원하는데 황산옥매광산 광부들도 이에 포함됐다.
1945년 3월 초 황산 옥매광산 광부 225여명은 제주도에 건설 중인 군사시설 곳곳에 강제 투입된다. 
그리고 조국이 해방되자 광부들은 어렵게 배를 구해 고향으로 향한다. 그러나 추자도 앞바다에 이르렀을 때 그만 배에 불이 나 모두들 바다에 표류하게 된다. 표류한 지 4시간, 일본 군함이 당도한다. 현장에 도착한 일본 군함은 표류하고 있는 광부들을 열심히 구한다. 이유는 표류자 중 옥매광산 간부였던 일본인 5명이 포함돼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본인을 모두 구했다고 판단한 군함은 바다에 표류 중인 118명의 광부들은 그대로 놔둔 채 현장을 떠난다.
살아서 돌아온 광부들은 이후 계를 구성해 모임을 가졌고 아들들에게 그날의 참상을 들려준다. 살아 돌아온 아버지들로부터 참상을 알게 된 아들들은 이 사건을 정리해 세상에 알리게 된다. 생존 광부의 아들인 故박장규 씨와 박주방 씨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들은 돌아오지 못한 광부들이 누구인지 찾아 정리하기 시작했고 자신들 대에 다하지 못한 일을 3세대인 지금의 유족회장 박철희 씨에게 넘긴다. 또 희생 광부들을 위한 추모비 건립을 유언으로 남긴다. 이유는 희생된 광부 중 10대 후반과 20대 초반은 후손이 없어 대가 끈긴 데다 118명 모두 무덤도 없기 때문이다. 이에 8·15 광복 72주년을 맞은 올해 황산옥매광산 광부들을 기리는 추모조형물 건립 움직임이 일고 있다. 해남 20~50대 100인이 추모조형물 건립을 해남우리신문을 통해 공개 제안했고 이 소식을 들은 황산면과 문내면 제 사회단체들도 뜻을 모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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