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백』  장강명 저 / 한겨례출판

 

 프랑스 현대 철학자 미셸 푸코는 학교의 기원을 도제식화 된 공장의 근무시간이 만들어낸 산물이라고 보았다. 정해진 시간에 출근하고 정해진 시간에 밥을 먹고 정해진 시간에 퇴근하는 기계화된 인간이 필요했다. 그들을 위해 ‘근로 시간표’를 만들어야 했고, 이와 비슷한 타임 스케줄을 지닌 것이 감옥이라고 통찰한 적이 있다.
시대의 이념은 냉·온탕을 오가며 급격한 패러다임을 변화시켰다. 
장강명의 소설『표백』은 왜 사는가(Why do you live)에서 시작해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결론을 이끌며 독자의 몰입도를 높인다. 작가는 모든 틀이 다 짜여 있는 세상에서 어떠한 담론도 생산할 수 없는 젊은 세대를 일컬어 표백세대라 이름 붙였다. 

 ‘볕에 쬐이거나 약품을 써서 희게 되다’는 뜻을 지닌, 표백의 사전적 정의는 각자의 생각, 창의성 등을 내재한 개성을 함몰하는 교실의 풍경으로 돌아간다. 정해진 물음에 선택할 수 없는 정답이 있는 사회의 모습이다. 그 이미지는 곧바로 노량진의 고시촌으로 이어지고, 7급 공무원 생활을 하며 옛 동료의 자살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주인공의 관념으로 이어진다.
자살은 나쁜 것인가. 옳은 것인가는 이분법적 사고를 떠나, 자기 몸의 결정권을 누가 지니는가는 물음을 던진다. 자기 몸의 파괴 이후 사회는 실패자, 도피자의 낙인을 덧씌운다. 그래서 소설에서는 청년들의 입김이 더 이상 구동되지 않는 완벽한 사회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역할로, 청년들 자신의 입장에서 가장 성공했다고 믿을 때 선택하는 길이 ‘자살’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래도 삶은 아름다워’라고 말하기 이전에 ‘자살’을 고민해야 한다.
열정, 끈기, 도전은 절망이라는 전제 속에 작동하는 매뉴얼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희망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아우슈비츠 등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빅터프랭클은 삶의 의미를 지닌 가치를 재발견할 것을 권유했다. 

 개성이 표백된 후, 마치 영원히 언덕에서 큰 돌을 굴려야 하는 시시포스의 형벌처럼 살아가고 있는 현재의 청년 세대들에게 ‘희망’을 전언하는 자기 계발서는 사뭇 위험할지도 모른다. 오히려 싸늘하게 표백된 청년들의 잔혹한 자화상이 날카롭게 세상에 파고들어야 했다. 소설 『표백』은 실체적 ‘변화’를 고민하지 않는 이 세계의 머리 위에 띄운 느낌표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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