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석천(전 교사)

 4월은 잔인한 달입니다. 흔히들 4월을 잔인한 달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시인 T. S. 엘리엇(Eliot)의 장편 시(詩)「황무지(The Waste Land)에서 비롯합니다. 
시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이하 생략)
「황무지」는 기술 문명에 갇힌 인간성과 수천만의 목숨을 앗아간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전쟁에 대한 허탈감과 무력감에서 비롯된 ‘생명이 깃들지 못하는 문명’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엘리엇이 말한 잔인함은 그런 황폐함조차 이겨내고 언 땅을 뚫고 나오는 놀라운 생명의 강인함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이죠. 
꽃의 계절, 현란하도록 눈부신 4월은 우리에게는 기억조차 하고 싶지 않은 잔혹한 달입니다. 작가 김탁환 님이 ‘누군가를 기억하기 위하여 그 아침과 그 봄이 돌아오는 것’이라 했듯이 4월이 오는 것 역시 그러할 것입니다. 

 4월이 되면 우리는 맹골도 앞바다로 고개를 돌립니다. 그리고 처참하기만 했던 사건을 되새김하며 먹먹한 가슴을 쓸어내립니다.
선체가 반쯤 기울어진 채로 물에 잠긴 세월호, 물 위에 떠 있었던 시간이 상당히 길었기에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구조의 손길을 기다리던 사이 300여 명의 생명이 물속으로 사라져 가는 모습을 망연자실 바라보기만 했던 4월입니다. 정부의 무능과  탐욕이 빚어낸 재앙이었고 무엇보다 인권 문제를 정치와 결합시켜 고귀한 생명을 경시해 온 대한민국의 부끄러운 민낯이었지요.
난분분한 4월이 네돌을 맞았습니다. 하나 아직도 세월호의 진실은 온전히 인양되지 않았습니다. 대다수 국민의 염원과는 달리 세월호의 진실을 불편해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라진 7시간의 행적’을 어떻게 해서든지 은폐하고 싶은 박씨를 비롯해 후안무치한 상부(上部)의 패덕(敗德)을 은폐하기 위해 양심을 팔아 거짓 증언을 한 이들, 마땅히 책임을 져야 할 위치에 있었지만 정권에 빌붙어 책임을 교묘히 피해갔고 여전히 호의호식하며 기득권을 누리고 있는 이들, 정권의 시녀 역할에 충실했던 모 신문과 방송 역시 세월호의 진실이 불편하기만 할 것입니다. 
또 세월호에는 그동안 우리 사회에 쌓여온 적폐들 곧 부조리한 관행과 부패, 권력의 무능, 국가의 책임 방기(放棄) 등 구조적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있기 때문에 사건에 관련된 이들은 세월호의 베일이 벗겨지는 것이 반가울 리 없을 것이겠지요. 세월호 사건을 ‘교통사고’로 위장하고 특위는 ‘세금도둑’이라고 몰아붙였던 모 당도 세월호 문제가 다시 부각되는 게 반가울 리 없을 것이고요.
역사를 기억하지 못하는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했습니다. 몇 번의 4월이 지더라도 사건의 실체가 규명되고 정의가 실현될 그날까지 국민의 가슴 속에 4월의 시간은 정지해 있을 것입니다.
세월호 참사 4주년을 맞아, 남대천을 찾는 연어처럼,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 바다로 회귀합니다. 하늘도 아팠던지 바람으로 울고 비는 눈물 되어 내립니다. 팽목항의 노란색 리본은 이젠 형체도 없이 사라지고 참연(慘然)함이 파도처럼 밀려옵니다.

 에빙하우스의 망각(Forgetting curve) 이론처럼 시간이 지남에 따라 처절했던 죽음에 대한 기억은 감소되어 가고 어떻게 해서든지 산자만 더 잘살아 보려는 몸부림이 거세게 일어나는 4월은 분명 잔인한 달입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기억하겠습니다.”고 했던 외침이 자꾸만 뒤돌아보아 지는 4월, 참담한 마음으로 누군가를 기억해야만 하는 4월은 잔인한 달입니다. 
진실이 온전히 인양되는 그 날까지 4월은 여전히 잔인한 기억으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후손들에게 물려 줄 이 사회를 조금이라도 더 안전하게 만들기 위해.
엘리엇의 시처럼, 허탈감과 무력감이 사라지고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낼 그 날까지….
4월은 누군가를 기억하기 위해서 봄비처럼 다시 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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