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이면 박길순 할머니 점방
있을 건 다 있어

▲ 95세 할머니가 운영하는 산이면 구성리 ‘솔찬히 아수운 담배집’은 옛 시골점방 그대로여서 점방 풍경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이름도 없는 점방, 옛 한옥집이 그대로 인 점방, 그것도 95세 할머니가 운영하는 시골점방이다. 할머니 머리는 비녀를 꽂은 쪽지머리다. 
산이면 구성리 마을회관 옆에 위치한 박길순(95) 할머니 댁을 마을사람들은 5~60년 전부터 ‘솔찬히 아수운 담배집’이라고 불렀다. 하루종일 찾아오는 이 없어도 이름 없는 점방은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집안 가득 걸린 사진들과 할머니 손때가 묻은 물건 등은 옛 시골마을 할머니 집 모습 그대로이다.
마을의 개발사업으로 할머니의 점방 담벼락도 무너져 덩그러니 집 안 속살이 드러나 있다.  
구성리 마을에 들러 논에서 모내기를 하는 아주머니에게 박길순 할머니를 찾아왔다고 했더니 아주머니는 “가차운데 있는디 못 찾았소” 하며 마을회관 옆에 있는 트럭 하나를 짚었다. “저 포터 보이는 옆집이여.”
반세기 동안 마을 점방을 드나든 발걸음이 어디 한둘이었겠는가. 격의 없이 대하는 할머니의 환한 웃음이 먼저 반긴다.
“난 뭔 총각이 지나가길래 그란갑다 했당께.” 아마도 할머니 댁을 찾아 헤매던 기자를 본 듯했다.  
 아흔다섯이라는 나이가 무색하게 할머니의 허리는 곧았다. 수만 번 쓸고 닦았을 토방에 엉덩이를 대고 찾아온 손님에게 기꺼이 시간을 허락했다.
“귀가 어두워, 작게 말하믄 못 알아묵어.”
보청기를 낀 왼쪽 귀를 손으로 가리키면서도 집 앞을 지나가는 사람을 보며 “나보다 십 오년은 젊은디, 저라고 실버카를 끌고 간당께.”
발음도 명확하고 목소리도 정정하다. 그 정정함이 묻어난 무화과나무와 단감나무가 보였다. 
“가을에 와 단감 따줄게.”
그러면서 할머니는 산이 파출소에서 제작한 액자 하나를 들고 나왔다.
할머니 손을 다정하게 잡고 찍은 점방 사진이었다. 근무지를 이전한 그 순경이 보고 싶다는 할머니는 손가락으로 사진을 꾹 가리킨다. 거기에는 “어릴 적 친구들 손 잡고 찾아간 이름 없는 점방, 지난 50년의 기나긴 세월을 할머니와 함께한 추억의 장소. 언제든지 오세요. 언제 올지 모르는 손님을 기다리는 할머니의 사랑과 포근한 정이 느껴집니다.”라는 글귀가 보인다.
마트가 즐비한 세상에 ‘점방’이라는 낱말이 지닌 아련함을 느끼며 간판도 없는 점방에 대해 소개해 달라고 할머니에게 부탁했다.
“요새는 차로 배달해서 사람들이 사 강께 손님도 없고 물건도 없어.”
인터넷 구매나 대형 마트에서 물건을 구매하는 경우를 할머니식 표현대로 일컫는 말이었다. 그래도 당장에 써야 할 생필품은 모두 구비돼 있다. 슈퍼 타이, 락스, 간장, 모기약 등이 그러했다. 
“아가들이 별로 없어 점방에 놓을 것이 없당께.”
유통기한이 짧은 빵은 없어도 심심찮게 입에 넣을 수 있는 주전부리 과자나 음료수는 점방을 차지하고 있었다. 사이다, 콜라, 농번기를 맞아 생수도 점방 한 칸에 세 들어 있다.   
‘감나무집 큰 애기’로 불렸던 할머니는 스무살 무렵 시집을 갔다. 친정집 뒤란에 감나무가 열일곱 그루가 있어 동네 사람들이 늘상 감나무집 큰 애기는 시집 안 가냐고 물었단다. 강진 군동면이 고향인 할머니는 거기서 배필을 만나 목포를 거쳐 이곳 산이면 구성리에 터 잡기까지 남의 집 셋방살이에 쪽 눈물 훔치며 살았다고 한다. 

 

▲ 95세 할머니가 운영하는 산이면 구성리 ‘솔찬히 아수운 담배집’은 옛 시골점방 그대로여서 점방 풍경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점방을 열고, 주판을 영감에게 배워 물건 파는 재미가 솔찬했단다. 손때 자국 어릿한 안방 돈 통은 그래서 유서가 깊다. 이 동네에서 살아남은 점방은 이것 하나뿐이라고 말하는 할머니.

“점방 배경으로 할머니 사진 한 장 찍어요.” 하자. 할머니는 그냥은 못쓴다며 꽃무늬 난방을 벗고 고운 분홍색 외출복으로 갈아입으신다. 머리도 단정하게 빗고, 십자가 목걸이도 맸다. 
할머니는 점방에서 자녀들을 키웠다. 그 세월을 짚다 보니 어느덧 구순 하고도 다섯 해가 훌쩍 흘려버렸단다.  
할머니집 안방의 자식들 결혼식 사진과 손주들 사진 등은 할머니의 역사였다. 
한 뿌리에서 뻗어나는 가지들이 꽃을 피우고 제각각 살길을 모색하고 또 열매를 맺었다. 
할머니와 다섯 해 차이 나는 할아버지는 25년 전에 먼저 하늘로 가셨다. 
그리움은 삭히는 것이 아니라 여무는 것이라는 것을 일러두듯 할아버지 사진이 반듯하게 할머니 안방을 차지하고 있다. ‘보고 잔께’    

 

김성훈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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