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딴섬서 마감한 삶…비운의 운명이 탄생시킨 ‘동국진체’

 

 

완도 신지도에서 완성한 동국진체, 남도의 한과 정서 담겨
당대 최고의 서예가로 남도지방 사찰마다 현판 글씨 남아 

▲ 원교 이광사의 부안 내소사 현판글씨(대웅보전, 설선당)

 완도 신지도에서 15년의 유배생활, 그곳에서 그는 동국진체를 완성합니다. 

추사가 제주도 9년의 유배에서 추사체를 완성했다면 원교 이광사(1705~1777)는 완도 신지도 유배생활에서 동국진체를 완성하지요.
그가 완도 신지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병풍족자, 비지, 서첩 등을 써달라는 주문이 너무 많아 날을 택해 썼을 정도로 그의 글씨는 당시 선풍적 인기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에 의해 완성된 동국진체는 해남, 강진, 보성, 광주, 전주를 거치면서 중앙으로 올라갑니다. 그리고 서울에서도 선풍적 인기를 얻은 것이지요.
따라서 원교의 동국진체는 남도 특유의 한과 풍류가 응축된 독특한 남도서예로 자리 잡습니다.
조선적인 조형성을 추구한 동국진체에 대해 추사 김정희는 조선의 글씨를 다 망쳐 놓은 글씨라며 강한 비판을 가합니다. 추사가 제주도로 유배 가던 중 대흥사에 들러 초의스님에게 원교가 쓴 대웅보전의 현판글씨를 떼어내라고 요구했다는 일화는 유명합니다. 

추사, 해괴한 글씨다 평가절하

원교의 동국진체는 그가 살았던 18세기 조선에서 가장 풍미한 글씨체였습니다. 따라서 원교는 생존 당시 서예가로 명성을 떨쳤고 그가 완도 신지도에서 집필한「서결」은 그 시대의 서예 지침서가 됩니다.
그런데 19세기 들어 추사체 바람이 불면서 원교의 동국진체는 낮게 평가가 됩니다. 이유는 추사 김정희의 영향입니다.
중국의 위진 남북조 시대에 북조에서는 비석의 글씨를, 남조에서는 법첩의 글씨를 교본 삼아 글씨를 썼습니다. 법첩이란 금석이나 탁본 등을 인쇄한 작품을 일컫습니다. 이것이 ‘북비남첩론’입니다. 여기서 원교는 남조의 법첩을 지향한 남파였고 추사는 새겨질 때의 모습 그대로 간직한 비석의 글을 갖고 공부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 북파에 속한 인물입니다.  
따라서 추사는 왕희지 법첩은 판각을 거듭하면서 변질돼 다 가짜라며 이것조차 모르고 왕희제체를 기본으로 해서 창작한 원교의 동국진체는 당치도 않는 글씨, 한마디로 국제적 감각이 전혀 없는 변방의 촌스러운 인물의 글씨로 평가절하합니다. 이런 추사의 평가는 후대까지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추사의 서법에 대한 철학은 청나라 옹방강의 영향을 받습니다. 옹방강은 ‘글씨는 북비(北碑)부터 배워야 하며 북비를 배우기 위해서는 당의 구양순에서 비롯돼야 한다’는 자신의 경험과 주장을 설파한 인물입니다.
명문귀족 출신이었던 추사는 신동소리를 들었던 인물이며 젊었을 때 청나라의 문물을 받아들인 인물입니다. 중국의 신문물에 심취해 있던 추사의 눈엔 원교의 동국진체는 그저 해괴한 글씨로만 보였던 것이지요. 

▲ 원교 이광사의 대흥사 현판글씨(대웅보전, 천불전, 침계루, 해탈문)

부인 유씨 목을 매 자결

왕실의 후손으로 한때 전성기를 누렸던 원교의 집안은 영조가 즉위하면서 몰락의 길을 걷게 됩니다. 영조가 즉위하자 그동안 소론 중심이었던 정권이 노론 중심으로 바뀌었고 소론에 속했던 그의 백부와 부친은 유배를 가게 됩니다. 
원교 23세(1727년) 되던 해 유배지에서 돌아온 부친이 병사하고 백부마저도 이인좌의 난에 연루돼 옥사하자 그는 벼슬길을 포기하고 서화에만 전념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의 나이 51세(1755년) 되던 해에 그도 나주벽서사건에 연루돼 함경도 부령으로 유배를 떠나게 되지요. 안타깝게도 이때 그가 참형 된다는 소문을 듣고 그의 부인 유 씨는 목을 매 자결하고 맙니다. 

그의 글씨 얻고자 줄을 서다

유배 8년째 그는 최북단 함경도 부령에서 최남단 완도 신지도로 이송됩니다. 원교는 인격이 높은 학자였습니다. 따라서 그의 학문을 흠모한 이들과 제자들의 발길이 부령 유배지로 이어졌지요. 이에 조정은 원교를 북쪽 끝에서 남쪽 끝인, 그것도 섬인 완도신지도로 이배시켜 버립니다. 
외로운 외딴섬으로 이배됐지만 원교의 명성은 날로 높아만 갑니다. 그의 글씨를 받기 위한 전라도 사람들의 발길이 신지도로 이어진 것입니다. 
그러한 이유로 원교의 글씨는 해남 대흥사와 황산면 도장사, 강진 백년사, 구례 천은사, 고창 선운사, 부안 내소사 등 여러 사찰에 걸리게 됩니다.
원교는 1762년(영조 38년) 9월5일 신지도로 귀양을 와 이곳에서 1777년 8월26일에 죽습니다. 원교가 살았던 집은 신지도 금곡리 경로당 뒤쪽에 있습니다. 황희 정승의 자손인 황치곤이 살았던 집으로 황치곤이 친구인 원교에게 내어준 집입니다.  
원교는 이곳에서 자신의 호를 ‘수북’이라 짓고 매일 붓을 잡았습니다.

▲ 원교 이광사의 강진 백련사 현판글씨(대웅보전, 만경루, 명부전)

자주적 운동에서 동국진체 탄생

조선 중기에서 후기로 이어지는 18세기는 한국 서화사에서 민족 자주의 자각이 싹트던 시기였습니다. 서예에는 동국진체가, 그림은 정선(1676~1759)의 동국진경(東國眞景)이라는 새로운 장르의 예술이 꽃을 피운 것입니다. 
18세기에 일어난 자주적인 운동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었던 조선사회의 자성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성리학의 한계를 극복하고 중화사상에 빠진 사상과 학문, 예술 등에 대한 반성이 선진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활발히 전개된 것이지요. 
조선색이 강한 동국진체는 옥동 이서(1662~1723년)로부터 시작됩니다. 성호 이익의 형이었던 옥동 이서는 공재 윤두서의 친구이기도 하지요. 옥동 이서의 동국진체는 공재 윤두서로 이어지고 원교 이광사에 이르러 완성을 보게 됩니다. 

서체에 우리고유의 생명력 담아

원교는 성리학이 기반이었던 조선시대에서 양명학을 탐구한 정제두의 학맥을 이은 강화학파의 중심인물입니다.
강화학파는 양명학을 비판적으로 수용했을 뿐만 아니라, 고증학(考證學)의 방법론도 주체적으로 소화했고 훈민정음연구·국어학·국사학·서법(書法)·문자학·문헌학 분야에서 탁월한 논저들을 남깁니다. 
서법에선 원교 이광사, 국사학에 연려실 이긍익, 매천 황현, 훈민정음연구에 서파 유희, 문자학에 남정화, 문헌학에 남극관 등 오늘날 국학 분야에서 거론되는 선구자들이 이 학맥에 속합니다.
원교도 역사, 문자학, 음운학, 서예 회화 등 박학다식을 추구했고 각 분야에 대한 조예도 상당히 깊어 생존 당시에 이미 명성을 떨쳤습니다.
특히 신지도에서 쓴 '원교서결'은 중국과 조선의 서법을 역사적으로 상호 비교해 조선 특유의 서법을 밝혔으며, 자연스러움과 근골격, 진서와 예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왕희지체를 본받았으나 우리 민족고유의 생명력을 강조했습니다.

▲ 원교 이광사의 강진 백련사 현판글씨(대웅보전, 만경루, 명부전)

23년 유배생활, 붓과 살다

원교는 왕실의 후손이자 예조판서를 지낸 아버지 이진검의 5남1녀 중 막둥이로, 추앙받는 귀족집안의 귀공자로 자랐습니다. 
그러나 젊은 나이에 당쟁으로 집안이 몰락하자 20년간 야인으로 지내며 정제두에게 양명학을, 윤순의 문하에서 필법을 익힙니다. 그는 시·서·화에 모두 능했고, 특히 글씨에선 뛰어난 재능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완도 신지도에서의 유배 생활은 그의 명성을 듣고 찾아오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그에겐 부귀영화와 가족도 모두 사라진 뒤였습니다. 특히 그가 연류된 나주벽서사건으로 그의 집안은 완전히 멸문됩니다. 
이때 그에게 남은 것은 비애였을 것입니다. 
그 비애가 동국진체라는, 조선 서예의 큰 획을 그은 글씨를 완성시킵니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대흥사 대웅보전에 걸린 원교 이광사의 글씨를 두고 획이 삐쩍 마르고 기교가 많이 들어간 것 같지만 화강암의 골기가 느껴진 향토색 짙은 작품이라고 평했습니다. 
글씨 한 획 한 획에 자신의 희로애락의 감정을 담아냈을 그의 글씨는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듯하면서도 조화롭고, 때로는 차분하게 가라앉은 듯했다가도 자유롭고, 그 어떤 틀에도 구애됨이 없이 자유롭습니다. 

▲ 원교 이광사의 고창 선운사 현판글씨(대웅보전, 정와, 천왕문)

남도 모든 사찰에 글씨 남겨

서예는 글씨를 쓴 사람 자체입니다. 원교 서예는 자연의 이치를 스승으로 삼아 살아 움직이는 획을 지향했습니다. 서법의 모든 틀을 깨고 자신만의 글씨인 동국진체를 완성한 원교, 우리민족 고유의 리듬과 멋, 감성이 담긴 동국진체를 통해 그는 조선 서예사의 한 획을 긋습니다. 
해남 대흥사에는 대웅보전(大雄寶殿)과 침계루(枕溪樓), 천불전(千佛殿), 해탈문(解脫門)이 원교의 글씨입니다. 완도 신지도와 가까운 거리에 있었던 덕에 대흥사엔 원교의 현판글씨가 많이 남아있습니다. 강진 백년사의 대웅보전과 만경루(萬景樓), 명부전(冥府殿) 현판도 원교의 동국진체입니다.
구례 천은사 일주문의 ‘지리산 천은사(智異山泉隱寺)’라는 현판은 단유(袒裕)선사가 중창할 때 원교의 글씨를 받아 걸어 놓은 것이라 합니다. 여기에 재미있는 설화도 전합니다. 
천은사는 사찰 내에 이슬처럼 맑고 차가운 샘물이 있어 감로사라 했는데, 이 물을 마시면 흐렸던 정신도 맑아진다 해서 한때 많은 스님들이 몰려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임진왜란으로 불탄 뒤 중건할 때 샘가에 큰 구렁이가 자주 나타나기에 잡아 죽였더니 샘이 솟아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샘이 숨었다 하여 천은사라고 이름을 바꾸었는데, 이상하게도 이름을 바꾼 뒤부터 원인 모를 화재가 잦고, 재화가 끊이지 않자 주민들은 절의 수기(水氣)를 지켜주는 뱀을 죽였기 때문이라며 두려워했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조선의 명필가 원교 이광사가 ‘지리산 천은사’라는 글씨를 물 흐르는 듯한 체로 써서 걸었더니 이후엔 화재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구례 천은사의 극락보전(極樂寶殿)과 명부전도 원교 글씨입니다.
김제 금산사의 천왕문(天王門), 고창 선운사의 대웅보전, 천왕문 정와(靜窩), 부안 내소사의 대웅보전과 설선당도 원교 글씨입니다.
모든 글씨가 잔잔하다가도 분방합니다. 신지도 앞바다의 잔잔한 듯하면서도 때로는 분방한 파도를 닮아서일까요. 

원교, 유배지에서 사망

원교는 완도 신지도에서 15년의 유배생활 중 사망합니다. 그야말로 바다 한가운데 외로이 서서 글씨만을 위해 살다간 그의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가장 조선스러운 서체를 남겼습니다.
완도 신지도에서 외로운 삶을 살다간 그는 현재 군사 분계선인 비무장지대 깊은 숲에 자결한 부인과 함께 묻혀있습니다. 죽어서도 그는 사람 속이 아닌 자연 속에 외로이 묻혀있는 것이지요.                    
 

박영자 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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