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석 천(전 교사)

 강진의 어느 저수지 곁을 지나다 보았던 글귀입니다.
‘내일도 당신이 이 자리에 머문다면’
낚시꾼들이 자주 머물렀다 가는 자리에 마을 청년들이 세워놓은 표지판의 내용입니다. 오죽했으면 그런 표지판을 세워 놓았을까요. 저수지 주변에는 라면 봉지, 막걸리병을 비롯해 낚시꾼들이 남긴 찌꺼기들이 너저분하게 널려 있었습니다.
요즘 저에겐 새로운 일감이 하나 생겼습니다. 돈이 되는 일이 아니라 제가 사는 아파트 주위에 설치된 CCTV 영상을 검색하여 쓰레기나 폐기물 무단 투기(投棄) 현장을 색출(索出)하고 단속하는 일입니다. 아파트 주민도 아닌 이들이 음식물 쓰레기나 가전제품 등의 폐기물을 으슥한 시간을 틈타 몰래 버리고 가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입니다. 
영상을 검색하다 보면 자가용을 세워두고 폐기물을 버젓이 버리고 가는 모습이 볼썽사납습니다. ‘도대체 저 양반에게 양심이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합니다. 더군다나 검정 봉지에 싸서 버리고 간 음식물 쓰레기의 내용물을 살펴보면 제법 잘 먹고 사는 듯합니다. 그까짓 처리 비용이 얼마나 든다고 양심을 투기하는지…. 쓰레기 처리 비용을 모아서 부자가 될 일은 결코 없을 텐데요. 
자기 쓰레기를 남의 집 앞에 버리는 행위는 후안무치(厚顔無恥)한 일이며 적폐 중의 적폐(積弊)입니다.
이제 쓰레기 문제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사회 문제이자 재앙이 되었습니다. 거리, 주택가, 공터, 상가 주변 할 것 없이 무단으로 버려진 쓰레기들이 눈에 거슬립니다. 
미국의 범죄학자인 제임스 윌슨과 조지 켈링이 발표한 「깨진 유리창 이론」처럼 무단으로 버려진 쓰레기들은 또 다른 쓰레기를 부르고 사회적 무질서를 부추깁니다. 
이솝우화의 저자인 이솝(아이소포스)이 어렸을 때 일어난 일입니다.
「이솝의 주인은 훌륭한 학자였습니다. 어느 날 주인이 말했습니다. 
“얘, 이솝아, 목욕탕에 가서 사람이 많은지 보고 오너라.” 목욕탕 문 앞에는 끝이 뾰족한 큰 돌이 땅바닥에 박혀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그 돌에 걸려 넘어지기도 하고 다치기도 합니다.
“에잇! 빌어먹을!” 사람들은 돌에 대고 욕만 퍼부을 뿐 누구 하나 그 돌을 치우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얼마 후에 한 사나이가 목욕하러 왔습니다. “웬 돌이 여기 박혀 있담!” 그 사나이는 단숨에 돌을 뽑아내고 손을 툭툭 털더니 목욕탕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이솝은 목욕탕 안에 들어가서 사람 수를 헤아려보지도 않은 채 그냥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주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목욕탕 안에 사람이라곤 한 명밖에 없었습니다.”」  
아름다운 사람은 머물다 간 자리도 아름답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말했죠. “지식은 행동을 수반해야 한다.”고. 
쓰레기를 불법으로 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사회적 약속이며 처리 비용의 많고 적음을 떠나 양심을 버리는 일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쓰레기를 무단 투기하는 까닭은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의 간격 때문입니다. 그 간격이 바로 인격이며 의식 수준을 말하는 것이겠지요.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의 간격이 좁혀질수록 우리 사회는 건강해질 것입니다.
이성복 님은 「뒹구는 돌은 언제 잠이 깨는가」라는 시집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정신의 아픔은 육체의 아픔에 비해 잘 감지되지 않기 때문에 병들어 있으면서도 알아채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또, 이외수 님은 말합니다. ‘동물이 인간으로 화하려면 100일 동안 마늘과 쑥을 먹어야 한다. 하지만 인간은 양심만 팽개쳐버리면 그 즉시 동물로 화해버릴 수가 있다’라고.
모든 사물은 형체가 곧으면 그림자도 곧고 형체가 굽으면 그림자도 굽은 법입니다. 
풍요의 시대입니다. 인격의 그림자도 풍요로웠으면 하는 바람, 잘 사는 사람보다 제대로 사는 사람, 사람이 아름다운 풍경으로 피어나는 세상이 되었으면 하는 소망을 가져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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