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이진서 치료 후 명량으로 
1909년 한말 마지막 의병중심지
30년대 ,최대 항일조직 결성

▲ 북평면 이진마을은 이순신이 몸을 치료한 후 명량으로 향한 곳이자 1909년 한말 마지막 의병 투쟁과 1930년대 최대 항일운동조직을 이끈 마을이다. 마을입구에 항일운동마을이라는 표지석이 있다.

 토사곽란으로 죽음의 문턱까지 이른 이순신이 다시 배를 탈 수 있을 만큼 기력을 회복한 곳이 북평면 이진마을이다. 이순신은 백의종군 이후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하지만 그에겐 배가 없었다. 조선수군이 칠천량 해전에서 전멸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이순신이 장흥 회령포에서 배설의 배 12척을 인수해 첫 도착한 곳이 이진이었지만 이순신은 토사곽란으로 이진에 머물러야 했고 전쟁 중인데도 배에서 내려 이진마을에서 병을 치료해야 했다.  
이진에서 기력을 회복한 이순신이 다시 배에 올라 도착한 곳이 송지면 어란진이었고 이곳에서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 복귀 후 첫 승리의 전투를 치른다.
이순신이 이진마을에서 기력을 회복해 어란전투에 이어 명량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자긍심은 수백년이 흐른 후에도 이진 사람들의 기억에 각인됐고 그 각인은 후손들에게 전달됐다.
그로부터 310년 후 이진마을은 한말의병운동의 마을로 떠오른다.
1907년 강제로 조선군대가 해산되자 전국적으로 의병활동이 전개되고 1909년에는 다른 지역 의병활동은 사그라진 반면 호남지방의 의병활동은 거세게 일었다. 
이에 일본군은 호남의병을 탄압하기 위해 1909년 남한대토벌작전을 전개한다. 이로인해 호남 의병들의 활동 무대는 해남, 완도, 진도, 영암, 강진 등 서남해안으로 국한되게 된다.
이 시기 해남지역 의병들은 두륜산을 기점으로 왜군의 우편선과 군수물자를 실은 배들이 입·출항하는 우수영과 왜적헌병대가 주둔해 있는 목포 등지까지 활약을 한다. 당시 의병들은 연합부대가 아닌 각자 소부대로 활동하며 산악게릴라투쟁을 전개한다. 이때 의병장으로 활동한 인물 중 한명이 이진 출신 황두일이다.
황두일 의병장은 1884년 5남3녀 중 2남으로 태어났다. 1909년 2월 들어 황두일은 이덕삼 항일의병부대 중군으로 활동하다 이후 독립부대를 편성해 의병장으로 활동하게 되는데 부대원만 120여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황두일의 활동으로 이진마을 사람 중 많은 사람들이 의병에 지원한다.
1909년 7월 들어 각자 활동하던 의병부대는 연합부대를 만들어 완도에 유배 온 황준성을 대장으로 추대한다.
그러나 이들은 최후 투쟁의 거점지로 삼은 대흥사 심적암에서 일본군에 의해 전멸되고 황두일은 이곳에서 빠져나오지만 이후 부하 79명과 함께 체포돼 교수형을 당한다. 
그로부터 18년 후인 1927년 이진마을에 동광학원이 건립된다. 이 마을 출신인 강기동이 중심이 돼 건립된 사설학원으로 북평면과 완도지역 청년들을 대상으로 반일의식을 교육했다.
동광학원을 중심으로 항일의식을 키워나갔던 이진마을에 1932년 일본으로 유학을 갔던 김홍배가 돌아온다. 
김홍배는 황두일 의병장이 활약했던 시기인 1909년에 김행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부농출신인 김홍배는 경성경신학교를 졸업하고 1930년 일본 와세다 대학 전문부 법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전국노동조합협의회에 가입해 반제운동을 벌이다 퇴학을 당하고 고향 이진으로 돌아온 후 동광학원을 다니던 청년들을 중심으로 항일조직을 만들어 소작쟁의 운동과 반일운동을 전개한다.
그리고 전국 최대 항일조직이었던 전남운동협의회를 결성한다. 1930대는 일본의 가혹한 탄압으로 독립운동이 위축됐던 시기이다. 3·1운동 등에 가입한 많은 이들이 변절돼 친일파로 활동하던 시기이다. 
그런데 한반도 변두리인 북평면 이진마을에서 호남최대 항일운동 조직이 결성된 것이다. 
1934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호외를 발간할 정도로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전남운동협의회 사건은 연행된 숫자만 1000여명, 57명이 치안유지법 위반과 출판법 위반으로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 송치된 사건이다.
1930년대 호남최대 항일운동 조직사건이었던 전남운동협의회 사건은 해남군과 완도, 장흥, 강진, 진도, 목포, 보성, 순천, 여수 등 9개 군에 걸친 광범위한 비밀 결사조직이어서 관련자들을 검거하는 데만 6개월이 소요됐다.
전남운동협의회는 이진 출신 김홍배가 중심이 돼 만든 조직이다.
이 사건으로 김홍배는 3년 형을 받아 목포형무소에 수감되고 출옥 후에도 미전향 사상범으로 분류돼 청주 예방구금소에 구금돼 있다가 해방 후 미군정에 체포되고 6·25 전쟁이 발발하자 후퇴하던 군인들에게 의해 처형되고 만다.
우수영과 더불어 해남 최대 항구도시였던 이진마을은 조선시대 수군진이 설치된 마을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했다.
반일의식이 강했던 이진마을 사람들은 일본인 상인들을 배척했고 그 결과 일본인 상인들은 남창으로 이주해 장사를 했다고 전한다. 또 당시 북평면소재지가 이진마을이었는데 일본은 일본 상인을 보호할 목적으로 면소재지를 남창으로 옮기고 조선시대 객사였던 해월루를 면사무소로 사용했다고 한다.
한편 이진은 조선시대 일본군과 일본해적을 막기 위해 설치된 수군진이다. 이러한 인연으로  이진은 일본군과 일본 해적들의 숱한 침입에 대항해온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따라서 이진마을은 조선시대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일본에 저항해 온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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