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남과북 온 겨레가 독립의 열망으로 만세운동을 벌였던 게 3·1운동이다. 이 운동이 도화선이 돼 우리 겨레는 줄기차게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이후 무저항 운동의 한계를 인식해 무장투쟁으로 전환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은 좌·우익 모두 한결 같은 염원이었다. 그러나 해방이 되면서 남한에는 우익정권이, 북한에는 좌익정권이 들어섰다.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좌익에 대한 혐오는 극에 달했다.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이들은 좌익이라는 이유로 유공자 선정에서 제외되고 잊힌 존재가 됐다. 
1933년 5월14일 조직된 전남운동협의회는 황동윤, 김홍배, 오문현, 이기홍 등 57명이 활동했던 호남 최대 항일운동 단체였다. 이들은 해남·완도·강진·장흥·영암 등 11개 군에 걸쳐 농민반을 조직하고 농민야학과 노동야학을 설치해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그런데 여기에 관련된 인물들은 해방 후 미군정 시절 해남의 11월 추수봉기를 일으켰다. 일본으로부터 해방됐는데 다시 식민지 시대의 제도가 부활하고 친일경찰이 재기용돼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은 한국전쟁 전후 경찰에 처형됐다.  
국가보훈처는 전남운동협의회와 연관된 인물 57명 중 30명을 독립운동가로 추서했지만 황동윤, 김홍배, 이기홍 등 핵심 인물 27명은 추서에서 제외했다. 국가 권력에 희생된 이들을 독립운동가로 추서해야 하는 모순 때문이었다. 
우리 사회 내부는 아직도 좌익, 우익이라는 진영논리에 갇혀 있어 화해와 사회 통합의 길까지는 요원해 보인다. 그러나 이제는 통합의 시대다.     
베트남 하노이에서는 북미 정상회담이 열리고 있다. 70여년을 적으로 살았던 북미도 비핵화에 이은 평화협정과 종전 선언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하물며 민족끼리야 일러 무엇 하겠는가. 이제는 좌·우익을 떠나 고단했던 그들의 삶에 국가가 정당한 역사적 평가를 내려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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