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승미(행촌미술관 관장)

 서울 성산동 해발 66m 성미산 일대 1,000여 명의 주민이 거주하는 마을공동체가 있다. 종일반 유치원, 어린이집이 드물었던 시절이다. 몇몇 젊은 맞벌이 부부들이 모여 육아와 직장 둘 다 포기하지 않고 아이들을 돌보는 방법을 모색했다. 
반일제 유치원 어린이집에 보내는 대신 부모들이 돌아가며 늦은 시간까지 아이들을 돌보기로 했다. 1994년, ‘성미산마을공동체’의 시작이다. 성미산 마을은 행정구역상 마을명칭은 아니다. 서울시 마포구 성산동, 서교동, 망원동에 위치한 성미산 인근에 사는 사람들이 모여 이룬 공동 육아 · 문화 커뮤니티를 지칭한다. 성미산 마을공동체는 맞벌이를 포기할 수 없는 젊은 부부들에 의해 당시에는 생소하기만 했던 공동육아로 시작했지만 점차 교육의 대안으로, 또한 주거와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삶을 생각하는 공동체로 발전했다. 지역민들 주도로 최초의 마을기업이라 할 수 있는 유기농 반찬가게 ‘동네부엌’ 카센터 ‘차병원협동조합’을 운영하고 인문학 독서클럽, 연극 · 사진동아리, 성미산어린이합창단 등 다양한 문화 소그룹 활동을 한다. 특히 2004년 국내 첫 12년제 대안학교로 '마을이 학교, 학교가 마을이다'라는 모토의 ‘성미산학교’가 설립되었다. 
그로부터 25년 후 해남에도 전남교육청과 해남교육지원청의 주도로 5개의 마을학교가 운영된다. 크게 기숙형 마을학교와 문화예술과 생태를 결합한 마을학교로 나눠질 듯하다. 기숙형마을학교란 도시의 아이들이 해남의 초등학교로 유학해 학교교육과 방과 후 교육을 받는 것으로 서울 인근의 강화도, 경기도, 그리고 산청 등에서는 이미 운영 중이다. 
지역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마을학교는 좀 더 지역정체성과 자존감 형성에 목적을 둔 지역기반 활동이 될 것이다. 행촌문화재단(이사장 김동국)에서는 2015년부터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전남문화관광재단과 함께 꿈다락토요문화학교를 운영하면서 대안을 모색해 왔다. 지난 5년간 매년 3월부터 11월까지 24주 토요일마다 해남의 어린이 청소년들의 생각과 놀이성향을 함께 익혀온 지역예술가들은 교육활동가들로 성장했다. 꿈다락의 성장과 함께 해남의 교육활동가들은 어느새 전남의 예술교육을 대표하는 전문가들이 됐다. 
그사이 꼬마들은 이미 청소년으로 훌쩍 커버리거나 대학으로 떠났다. 우리의 간절한 바람은 대학으로 혹은 도시의 직장으로 떠났거나 떠나려고 하는 아이들이 다시 돌아와 해남의 청년으로 건전한 지역 군민으로 행복한 삶을 영위하는 개인으로, 공동체로 성장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성미산의 첫아이들이 이미 30대가 돼 다시 성미산마을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것처럼 말이다. 본래 마을은 학교다. 어린 시절 어른들의 밥상머리 가르침이 첫 교육이며, 대가족의 고모와 삼촌들이 만들어주던 손수건이나 팽이, 연이나 썰매가 문화예술교육의 시작이었다. 명절이면 마을어른들이 모인 커다란 마당에서 떡메를 치거나 척사놀이가 마을공동체의 일원으로의 가입절차였다. 
마을은 공동체의 일원으로 생존을 위한 학교였다. 근대 제국주의와 함께 전문화된 제도권 학교가 생겨나기 전 수천년 수만년 동안 인간이 자연과 공존하며 지혜와 지식을 후대에 전달하는 방법은 사소하게는 삶의 습관과 생활에 대한 전달, 그리고 집단 혹은 공동체의 가치와 이념을 공유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공동체의 가치란 지금도 국가와 지역을 유지하는 기반이다. 100년 전 해남에 처음으로 제도권 학교가 설립됐다. 그러나 해남에는 이미 1600년 전부터 대단한 대학이 존재했다. 임진왜란 때 서산대사(西山大師)가 거느린 승군(僧軍)의 총본영이 있었고, 3인의 대종사(大宗師)와 13인의 대강사(大講師)를 배출시켰으며, 조선의 석학이라 불리던 초의와 추사가 머물던 대흥사다. 그 대학으로부터 오늘날 공동의 가치관이 형성되고 있었다. 마을은 삶의 지혜를 알려주는 거대한 학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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