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 준 호(청년 국악인)

 “준호씨는 여기에서 언제까지 일해요? 2년 동안 정말 고마웠어요. 덕분에 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네요”
정방향을 탐지하기 위해 계단을 탁탁 두드리던 시각장애인의 지팡이 소리가 한 번쯤 생각날 때가 있다. 벌써 12년 전 이야기다. 
김제에서 광주로 오신 분은 시각장애인, 정읍에서 광주로 오신 분은 전동휠체어를 타고 일상을 영위했다. 나는 그들이 발을 딛는 광주역에서 20대 초반, 26개월을 공익근무요원으로 생활을 했다. 세대도 다양한 환경 속에서 역무원들의 배려가 있었고 각지에서 온 승객을 접하면서 내 세계를 좀 더 확장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행복을 드리는 광주역 박준호입니다.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그곳에서 맡은 업무는 기차의 개·집표 및 역내 질서유지와 환경정리였다. 특히 장애인과 노약자 승객의 승하차를 돕는 일은 내가 도맡아 하게 됐다. 낯선 곳에서 몸이 불편한 사람을 만나면 어떻게 대해야 할 줄 몰랐다. 몰랐기 때문에 나는 좀 더 고민할 시간을 가졌다, 생각 없는 행동이나 말, 눈빛이 행여 그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을까 하는 고민이었다. 
모르는 것은 잘못은 아니지만, 모른다고 무턱대고 행동하는 것은 분명하게 잘못 사는 것이다. 20여 년 간의 삶, 장애인을 접할 기회도, 그들을 대우할 방법도 몰랐다.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내가 그들을 알기 위해 노력을 하지 않았다. 나는 광주역에서 만난 김제 아저씨, 정읍 아저씨의 이름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의 발걸음을 보조해주고, 내 공익근무요원 생활이 끝날 때쯤 내 삶에 귀중한 깨달음을 배웠다. 눈으로 보지 못한 사람과의 마음의 이음이 필요한데, 그것은 바로 내 마음에서 우러난 진심 어린 부축이었다. 상대는 따뜻한 체온으로 내게 다가왔다.
사실, 시각장애인이었던 김제 아저씨를 안마사로 착각했다. 그러나 날마다 안내하면서 짧은 대화를 통해 점차 서로에 대해 친해졌고 김제 아저씨가 공부를 하기 위해 광주에 오신 학생이었던 것을 알게 됐다. 김제 아저씨는 나중에 내 발걸음만 듣고서도 “준호씨”라고 인사를 했다. 시각장애인에 대한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내 맘대로 생각한 게 너무나 죄송스러웠다. 2년간 날마다 안내를 해드렸고 내가 소집해제 되기 전 학교를 졸업하시면서 그동안 고마웠다고 말씀하신 그 울림이 내 마음속에 아직도 있다.
도움이 필요한 승객을 안내해드리면서 느낀 점은 그들이 자기의 삶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열심히 살고 있는 평범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그분들을 만나면서 20대 시절의 불평불만이 긍정적인 사고로 바뀌는 전환점이 됐다. 환경은 중요하지 않았다. 본인의 노력과 생각이 중요했다. 사람은 마음만 먹으면 못해낼 일이 없었다. 비록 군생활이 아닌 사회생활을 먼저 경험해 볼 수 있는 공익근무였지만 누구보다 열심히 근무했고 지금도 가끔씩 역무원들과 안부를 묻고 지낸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눈이 있어도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사람들이 있고, 귀가 들려도 이해에 따라 못 들은 척하는 사람도 있다. 나 또한 그러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눈과, 맑은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가 있다는 데 감사하게 생각하고 소중하게 여긴다. 이제 그런 마음으로 내가 사는 지역에 말하고 싶다. 
“행복을 드리는 해남 청년 박준호입니다. 무엇을 함께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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