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욱하(재경향우 수필가)

 비 맞는 처량함을 완벽하게 공감할 수 있는 길은 우산을 받쳐 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을 때다. 
또 부모가 철없는 자식에게 “설움 가운데 배고픈 설움이 제일이다. 돈을 아껴라”라고 훈계할 때도 정작 당사자가 단 한 끼라도 밥을 굶어본 후에라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을 특별한 법칙이라고까지 부를 수는 없다. 신이 인간을 그렇게 창조했기 때문이다. 즉 고통을 통한 배움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고통 뒤에 진정한 깨달음이 있음의 반증이다. 바꾸어 말하면 고통 없이는 무엇이든 진정으로 배울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3월 한 달 동안 3·1 독립운동과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보내면서 우리가 깨달은 것 역시 이와 같은 이치가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나라는 지금까지 일제침략 36년 동안의 위안부 동원과 강제징용은 물론 이런저런 수많은 고통과 슬픔에 대해 시종일관 진정한 사죄를 요구했지만, 일본은 지금까지 한사코 외면하는 것도 모자라 역사적 사실까지 부정하고 있다. 
그것뿐인가. 지난번 자유한국당 대표선거에서 어느 후보자는 5·18 광주민주항쟁을 폭동이라고 불렀고, 또 다른 후보자도 유공자 모임을 괴물집단이라고 폄하했다. 뿐만 아니라 요즘도 가끔씩 세월호 유족에 대해 세월호 장사 그만두라는 오만이 터져 나올 때가 있다.
이것은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 대한 학습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일본의 주장처럼 이제는 그들의 사죄를 포기해야 할까? 또 자유한국당의 주장처럼 5·18광주민주항쟁과 세월호 사건의 슬픔도 이제는 그만 접어야 할까?
아니다. 그건 절대 아니다. 두고두고 되새겨야 할 현재 진행형의 고통과 슬픔이 돼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왜냐하면 그것만이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의 참된 학습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선대학교 문예창작과 신형철 교수는 지난 연말에 발간한 그의 산문집『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서 “인간이 배울만한 가장 소중한 것과 인간이 배우기 가장 어려운 것은 정확히 같다. 그것은 바로 타인의 슬픔이다.(···) 타인의 슬픔에 대해서라면 인간은 자신에게 한계다. 
그러나 이 한계를 인정하되 긍정하지는 못하겠다.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슬퍼할 줄도 아니까. 한계를 슬퍼하면서 그 슬픔의 힘으로 타인의 슬픔을 향해 가려고 노력하니까”라고 했다. 뿐만 아니라 “타인의 슬픔에 대해 함부로 ‘이제 지겹다’라고 말하는 것은 참혹한 것이다. 그러니 평생 동안 해야 할 일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슬픔에 대한 공부일 것이다”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 타인에 대한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이 제대로 이루어진 후에라야 사람과 사람의 평화는 물론 한일관계를 비롯해 국제평화도 유지될 수 있으리라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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