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준호(청년 국악인)

 “제게 평범한 가정을 만들어 주세요”
중2때였다. 불의의 사고로 아버지는 하늘나라에 먼저 가셨다. 이전의 난 평범함이 주는 행복을 모르고 살았다. 동생과 함께 하굣길에 항상 해남읍교회에 들러 기도를 했다. 내 소원은 평범한 가정을 이루고 지키는 것이었다. 
내 결혼식에 온 가족이 멀리서 와서 축하해주었다. 
“안녕? 네가 준호구나, 나는 준호삼촌이야.”
“안녕하세요. 준호에요 결혼 축하드려요.” 
아빠를 꼭 닮은 준호와의 만남을 잊을 수 없다. 대구청년의 큰아들 이름은 나와 같은 ‘박준호’였다.  
우리집은 ‘가정하숙’을 운영했다. 하숙생들과의 인연은 새로운 가정 탄생의 기억으로 이어졌다. 비록 혈연관계의 가족은 아니지만 해남의 따뜻한 인심과 정을 통해 맺어진 ‘가정하숙’의 가족들은 해남이란 공간과 해남 사람을 잊지 않았다.
오랜 기억 속 ‘가정하숙’의 대구 청년은 이제 두 아들의 아버지가 돼 우리 집을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아들아 여기가 우리 가정의 시작이란다.” 24년 전, ‘가정하숙’에서 뒷방 대구 청년과 앞방 나주 아가씨는 인연이 돼 가정을 이뤘다. 당시, 국민연금관리공단이 해남에 생겼을 때 광주, 순천, 여수, 나주, 대구 등 각지의 젊은 청년들이 직장을 찾아 해남에 오게 됐다. 낯선 지역에서 그들은 같은 하숙집에 삶을 꾸렸다. 하루 세끼를 함께 먹고, 함께 일을 했다. 기억에 남는 장면은 노을이 깔리는 저녁 무렵에 마당에 놓인 평상에서 하루의 피곤함을 대화를 통해 해소할 때이다. 때론, 울고 웃으면서. 하숙생 청년들과 친해져 그들이 보는 각지의 신문을 따라서 읽게 되었고, 초등학생임에도 내용도 잘 모르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대해 토론을 시작했다. 삶이 다양한 만큼 듣는 이야기도 다양했다. 전주 청년은 쌍방울, 대구청년은 삼성, 광주청년은 해태를 응원했다. 야구중계가 있는 날은, 하숙집 안방은 올림픽 분위기를 연상케 했다.
그런 청년들 중 대구청년은 어엿한 아버지가 돼 해남을 다시 찾았다. 그의 어깨 뒤에는 그보다 키는 작지만 당시 청년의 눈매를 닮은 아들 준호가 서 있었다. 
그는 두 아들을 데리고 허물어져 가는 가정하숙을 돌아본 후 금강골로 발길을 옮겼다. 그의 보폭에 따라 아들들이 걷고, 생전 처음 보는 해남의 풍경을 아들들은 두 눈에 담고 있었다. 아버지의 과거와 아들의 현재가 금강골로 올라가는 입구에 표지석처럼 박히는 순간이었다.      
내가 생각하는 행복은 평범한 가정 속에 느끼는 평안함이다. 내 딸은 춤추고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한다. 아들은 맛있는 것을 먹을 때 가장 행복한 모습이다. 나와 아내는 조용한 음악을 틀고 따뜻한 커피 한잔에 행복함을 느낀다. 어머니는 친구들과 함께 산에 오르는 것을 좋아하신다. 이런 소소한 행복을 누리기 위해 서로에 대해 애정과 관심을 갖고 꾸준히 대화를 한다. 
행복한 가정은 어느 한 사람이 만드는 게 아니다. 가족구성원 모두가 노력해야만 행복한 가정이 된다. 
5월은 가정의 달이다. 그동안 소원했던 가족과 이웃을 돌아보며 담장 너머의 큰 이야기가 아니라 ‘잘 있어요’와 같은 작은 대화부터 나눠보는 것은 어떨까? 
그래서 지금보다 더 행복한 가족공동체, 이웃공동체를 디자인해 보는 것은 어떨까? 서로가 원하는 삶의 양식을 들여다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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