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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손,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
박태정 기자  |  534023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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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7.01  15:5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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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내면 장포리 박순례씨
여전히 손은 쉬지 않는다

   
▲ 박순례 어머니의 뒤뜰린 손가락은 고단했던 우리네 어머니들의 삶을 그대로 대변해 준다.

 모진 삶의 표징인 어머니의 뒤틀린 손가락.   
“내가 평생 안 해본 것이 없어. 갈치장시, 멸치젓 장시, 고구마순 심으러 무안까지 댕겼제”
‘어머니’는 북일 원동에서 문내면 장포리로 시집을 왔다. 잘사는 집이라는 중매쟁이의 말만 믿고 아버지는 딸을 그곳으로 시집을 보냈다. 그러나 막상 와서 본 시댁은 산속의 방 한 칸짜리 오두막이었다. 아들이 태어나면서 남편과 시어머니, 이혼한 시숙의 세 딸까지 맡겨져 모두 일곱 식구가 비좁은 오두막에서 살아야 했다. 
박순례(78) 어머니의 결혼생활은 꿈과는 너무도 멀었다. 신혼의 몸에 이혼한 시아주버니의 아이들까지 돌봐야 했다. 그야말로 죽으로만 연명해야 했던, 얼척없는 세상이 ‘어머니’ 앞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땅이 없어 남의 집에 품을 팔아야 했고 그것도 없는 날이면 갈치상자, 멸치상자를 머리에 이고 화원으로 문내로 돌아다녔다.
평생 안 해본 일이 없다던 굳센 ‘어머니’를 버티게 해 준 건 큰아들이었다. 키도 크고 공부도 잘했다는 큰아들을 보며 고된 노동과 배고픔을 이겨냈다. 
그러나 어머니의 버팀목이었던 아들은 1980년 5·18이 나던 해에 세상을 떠났다. 그토록 굳세게 살아왔던 어머니지만 지금도 죽은 아들 이야기에는 눈물을 보인다. 
당시 중학교 3학년이었던 아들은 키가 크다며 학교에서 단체로 맞던 뇌염예방주사에서 제외시켰단다. 그리고 그해 여름방학을 보내고 뇌염으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러나 어머니 억척스러운 삶은 중단할 수 없었다. 아들을 잊기 위해, 나머지 자식을 키우기 위해 더 굳세졌다. ‘어머니’의 손은 그렇게 땅을 일구며 1남3녀 모두 고등학교까지 보냈다. 
지금은 논 800평에 밭 400평이 박씨 부부의 재산이다. 

   
 

 지난 24일 땡볕에 용박골(용바위골) 참깨밭을 매고 있던 ‘어머니’를 찾았다. 구부러지고 퉁퉁 부은 손이 참깨 모종을 솎고 호미로 풀을 뽑고 있었다. 왼손 엄지와 검지는 신혼 때 밭을 매다가 호미로 찍어서 손톱 부분이 잘려나갔다. 약지는 구부러지고 관절이 부어올랐다. 그래도 ‘어머니’의 손은 아직까지 쉬어보지를 못했다. 무릎은 관절염으로 온통 파스투성이였다. 척추 또한 병원에서 시술을 받았는데, 걷기 위해서는 유모차에 의지해야만 한다. 시집올 때 고왔을 손, 어머니의 손을 가만히 내려다본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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