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석천(전 교사)

 나는 삶을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를 좋아한다. 다큐에도 구성상 약간의 픽션은 가미될 터이지만 사람이 중심이 되는 ‘사람 사는 이야기’가 좋아서다.
EBS에서 방영된「한국 기행」이라는 프로그램을 보았다. 부부가 산골에서 닭과 함께 살아가는 내용이었다. 그중 병아리가 알에서 깨어나는 이야기가 관심을 끌었다.
병아리가 깨어나는 과정은 줄탁동시(啐啄同時)라는 용어로 잘 알려져 있다. 줄(啐)은 달걀이 부화하려 할 때 알 속에서 내는 소리며 탁(啄)은 어미닭이 그 소리를 듣고 바로 껍질을 쪼아 깨뜨리는 행위다. 병아리와 어미닭의 협응에 의해 병아리가 밖으로 나오게 된다는 것이다.
교육에서는 ‘학습은 학생의 욕구와 교사의 도움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설명할 때 줄탁동시라는 말로 설명한다. 이는 스승은 깨우침의 계기만 제시할 뿐이고, 나머지는 제자가 스스로 노력하여 깨달음에 이르러야 함을 의미한다고도 한다.
그런데, EBS 다큐의 내용은 조금 달랐다. 부화할 날이 되면 병아리는 부리로 껍질을 쪼아 작은 구멍을 만든다. 다음에는 그 구멍을 발로 밀어서 오직 자신의 힘만으로 껍질을 깨고 나온다는 것이다. 카메라는 병아리가 부화되는 과정을 실증적으로 보여주었다. 물론 어미닭이 알을 품은 것이 아닌 부화기에서 부화되는 과정을 보여주었기에 어미닭의 역할인 탁의 과정을 볼 수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산골 부부는 병아리가 알을 깨뜨리고 나올 때까지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고 바라보기만 했다. 탁(啄)이 없이 스스로 태어나도록 했다. 그 과정에서 인간이 도와주면 나약한 병아리가 되어 도태될 수밖에 없다고 했다.
병아리의 부화 이야기는 사실이건 그렇지 않건 간에 교육에 대한 방향을 제시해 준다. 병아리가 먼저 바깥세상을 향해 나가려는 내적 동기가 있을 때 어미닭의 도움이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줄(啐)도 부모가 대신하고 탁(啄) 역시 때가 여물기 전에 깨뜨리려는 과욕 때문에 아이들을 나약하게 만들거나 혹사시키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한다.
동물인 병아리의 부화는 자연적, 본능적인 행동이다. 강아지도 소도 태어나자마자 스스로의 힘으로 걷는 것은 본능적인 행동이다. 그러나 사람은 부모의 도움 곧 탁(啄)을 필요로 하는 존재다. 하지만 ‘헬리콥터 맘’, ‘캥거루 맘’, ‘알파 맘’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부모의 욕심이 탁(啄)의 범위를 넘어 아이의 리모컨이 된다면 과잉보호가 되고 오히려 의존적이고 나약한 자식을 만들 뿐이다. 부모가 욕심을 낸다고 해서 아이들이 부모의 욕심대로 자라주지는 않는다. 그건 오히려 상처가 될 뿐이다.
정채봉 시인의 ‘콩씨네 자녀 교육’이라는 시다. “광야로 내보낸 자식은 콩나무가 되었고, 온실로 들여보낸 자식은 콩나물이 되었다.” 자녀교육의 방향에 대해 새길만한 경구(警句)다.
김현수 저『공부 상처』라는 책에는 이런 말이 있다.
‘원래 공부를 못하는 아이는 없다. 나는 그것을 공부에 대해 상처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말할 것이다.’
1등만 선호하는 우리 사회의 분위기상 환호 없이 달려야 하는 열등(劣等) 마라토너의 고통은 당사자만이 알 일이다.
어떻게 하면 우리 아이를 공부하는 아이로 만들 수 있을까?
그건 배우려는 의지(줄-啐)를 새롭게 하는 것이다. 공부 상처를 치료하고 새로운 동기를 부여해 주는 것이다. 아주 작은 일에도 칭찬을 해주며 자긍심을 세워 주어 긍정적인 아이로 만드는 일이다. 부모는 자녀의 재능을 찾아 안내해주는 내비게이터(navigator)가 되어야지 해결사인 터미네이터(terminator)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공부 상처』의 마지막 부분에 있는 말로 글을 마무리한다.
“우리 아이들이 지금은 비록 상처를 안고 배움을 싫어하더라도 부디 극복하여 자신의 삶을 멋지게 이끄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아이들을 마땅히 돕고 안내해야 할 의무가 우리 모두에게 있다.”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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